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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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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배호남
  • 등록일 : 2021.06.19 13:05
  • 제목 : 극진했던 자유주의자
  • 내용 :
    조해일 선생을 언제 처음 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많은 제자들 이 그렇듯이 '소설창작' 강의시간이었으리라. 그 과목이 2학년 수업이니, 내가 만 스무살 무렵. 하지만 나는 시인 지망생이었고, 그래서 특별히 그 강의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학부 시절 내내 조해일 선생은 내게 그저 여러 명의 교수'님'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선생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게 된 건 대학원 박사과정 무렵부터다. 그것도 논문 지도교수와 제자 관계가 아니라, 종종 모여서 함께 술 마시는 악동(선생은 가까운 제자들을 '악동들'이라 부르셨다)이었다. 선생이 지도하던 '들녘'이라는 소설창작학회가 있었는데, 나는 들녘 멤버가 아님에도 자주 그 모임에 끼어들어 함께 술을 마셨다. 선생은 술을 한 잔도 못하시던 분이다. 간에서 알콜을 분해하는 효소가 선천적으로 부족해서, 생맥주 한 잔에도 얼굴이 빨개지셨다. 주량의 최대치인 생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선생은, 제자들과 새벽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조해일 선생을 떠올리면 단연 '자유'가 첫 단어다. 나는 지금껏 선생만큼 개인의 자유를 극진히 추구하고 지키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그는 개인을 억압하는 일체를 증오했다. 그 증오가 그를 타인과 연대하게 했다.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 문장에 관해서는 딱히 선생으로부터 배운게 없다. 내가 배운 것은 더 크고 중요한 것, 오직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타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교수라는 권위, 명망 있는 작가라는 권위를 그는 진즉에 내다 버린 사람이다. 나이가 많건 어리건, 돈이 많건 적건, 많이 배웠건 못배웠건, 모든 사람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도덕교과서에 나오지만 누구도 실천하지 않는 진리를, 내게 삶으로 보여준 분이 조해일 선생이다.

    그리고 그의 자유에 대한 존중과 연대가, 선생을 늘 젊게 했다.  청바지 입고 청년들과 자주 어울린다고 환갑 노인이 젊어지는게 아니다. 선생은 정신이 유연하고 만사에 호기심이 많았다. 모르는 것은 몇번이고 제자들에게 물어가며 배웠다. 그렇게 컴퓨터를 배우고 인터넷을 배우고 SNS를 배우고, 세상과 연대했다.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 입원하기 직전까지, 선생의 SNS에는 해고 노동자들을 위한 기금모금과 희망버스를 알리는 소식이 자주 올라왔다. 그가 무슨 특별한 이즘이나 주의에 경도되어 그런 것이 아니다. 선생에게는 그런 연대가 모든 개인의 자유를 지키고자하는 자연스런 성정의 발로였다.

    제자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해일 선생은 모든 제자들을 아끼는 은혜로운 선생이 아니었다. 그는 권위적인 사람, 옹졸한 사람, 위선적인 사람을 멀리했고 제자라고해서 다르지 않았다. 조해일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는 온전한 개인 대 개인으로 동등하게 맞설줄 알아야했다.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어느 해인가 스승의 날이었다. 대학원에서 논문지도를 받는 제자들이 감사를 표하는 의례적인 자리를 마련했다. 허나 선생은 그날 우리 악동들과 술자리를 가졌고, 끝내 대학원생 모임 자리에 가지 않았다. 그 제자 모임의 좌장역을 맡았던 한 선배는, 그후 술에 취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네가 선생님 제자가 아니야. 우리가 진짜 선생님의 제자들이야." 나는 속으로만 이렇게 말했다. "너가 그 따위니까 선생님이 제자로 안 받아주시는 거야. 쯔쯔." 

    사람은 나이가 들면 정신이 굳는다. 옹졸해지고 고집스러워지고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나 흘러, 선생을 처음 뵈었던 내 만 스무살 무렵의 선생님 연배에 내 나이가 다가가고 있다. 그렇담 지금의 나는 그때의 조선생님처럼 유연하고 자유로운가? 택도 없다. 어찌하리. 부던히 노력하는 수밖에. 선생이 그러하셨듯이.

    공교롭게도 나 역시 대학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학생들을 대할 때마다 생각한다. 조해일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20여년 전에 죽심방 악동들과 모여 술을 마시면 술값 계산은 늘 선생님 몫이었다. 얻어먹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염치가 없어진 제자들이 어쩌다 계산이라도 할라치면 선생은 나무라며 특유의 함경도 사투리로 이렇게 말했다. "예서 내보다 연봉 높은 사람 있으면 그 친구가 계산하라우. 그 전까지는 술값은 내가 내갔서." 선생이라 제자들에게 무조건 베푸는 게 아니라,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자를 위해 가진 것을 내놓는 일.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가르침이었다.

    대학 강단에 선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나는 조해일 선생 같은 사표가 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택도 없다. 그저 학생들과 술자리할 기회가 있으면, 선생이 그러셨던 것처럼 입은 닫고 귀를 열고, 술자리가 파하면 술값 계산이나 열심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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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홍권호
  • 등록일 : 2021.06.20 21:45
  • 제목 : 차나 한 잔
  • 내용 :

    내가 아는, 조해일 선생님은 당당한 사람을 좋아했다. 사회의 갖가지 위계들이 인간을 얼마나 작게 만들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소통을 방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민감하셨고 무엇보다 거기에 질색하셨다.

     

    나는 사람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당당한 스타일은 아니다. 더구나 나보다 높은사람에게 당당하게 다가가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러므로 선생님에게 나는 대하기 불편한 사람에 속했다. 다행히 나는 언제나 당당한 사람들과 함께 깍뚜기로 끼어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기에 불편할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문리과대학 조교로 근무할 때 조해일 선생님이 나를 연구실로 부른 적이 있다. 당시 선생님은 일인칭 소설이라는 작품을 쓰고 있었는데 그날 쓴 글에 손수 그린 그림을 더해 들녘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고 싶어 하셨다. 그 방법을 모르셨기에 나를 부른 것이었다.

     

    분명 나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어떤 부분을 놓쳤는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컴퓨터 앞에서 낑낑거리자, 결국은 과 조교를 불러 그 일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민망한 나는 급히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선생님께서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하셨다. 나는 살짝 놀랐다. 나는 불편한 사람인데, ?

     

    그때 차를 마시지는 못했다. 하필이면 내 후임으로 조교 일을 하게 된 선배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선생님은 근무 시간에 나를 연구실에 사적으로 불렀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끼셨는지 어서 가보라고 하셨다. 물론 내가 냉큼 차 마시고 가겠습니다, 하고 반응하지 않은 이유도 컸으리라.

     

    만약 그날 차를 마셨다면 어떤 광경이 벌어졌을까? 다시는 이 녀석과 단둘이 차를 마시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선생님께 심어주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후에도 선생님과 단둘이 차를 마실 기회는 없었으므로,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선생님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선생님과 단둘이 차를 마시는 것은 상상의 차원에 영원히 머물게 되었다. 더는 어찌할 수가 없다, 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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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최웅식
  • 등록일 : 2021.06.18 00:26
  • 제목 : 첫만남이 생각나는
  • 내용 :

    첫 만남이 생각나는 1주기

     

    2005년이었나, 집에서 연락이 왔다. 보증 때문에 집이 넘어갈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집이 넘어가면 제가 다시 찾아올게요. 그 집.”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는 나에게 조해일 선생은 가끔 글을 쓰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집에 관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학원 강사, 인터넷 강사, 과외 강사를 했다. 대학원 다니면서 과외를 한 달에 백 개 정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몇 년이 지났던가. 다시 글을 쓰려고 책상에 몇 시간 앉았는데, 한 줄 썼다. 주어, 서술어, 목적어로 된 한 줄 정도의 글. 슬프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더니, 어깨가 흔들거렸다.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떨림이 묘한 공기를 만들었다. 내 손을 봤다. 내 감각은 죽어있었다. 나는 문장과 문체를 잃었다. 다시 대학원을 다니면서 박사과정을 밟을까. 그러면 논문을 써야 하는데, 논문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는 다르기에, 금방 글에 대한 감각이 회복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모대 예술대학원에서 운영하는 단기과정을 밟았다. 나보다 엄청 나이 많으신 분들이 문학소녀, 문학 소년이 되어 글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때 나를 문학으로 인도한 황순원을 떠올렸다. 아 맞다, 나는 황순원 선생에게 배우려고 모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면접을 볼 때 조해일 선생이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황순원 선생은 퇴임했다나. 그러고 보니, 그게 조해일 선생과의 첫 인연이었다.

    다시 소설을 쓰면서 다시 감각을 회복하려 했다. 문장과 문체를 다시 찾아야지 하면서. 새로운 소설 초고를 2009년 정도에 쓴 것 같다. 다시 쓴 글을 k 선생에게 보여주었는데,

    야 최웅식, 리얼리즘이 최고야. 이거 다 뻥이잖아.”

    내가 선생을 꼬나보았다. 갑자기 k 선생은 나도 그랬어, 탐미적이었다나. k선생이 원하는 건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는 글쓰기. 내가 아팠던가. 잘 모르겠다. 내 인생이 좀 꼬인 거고, 하나씩 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나는 문장과 문체만 다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해일 선생은 문장과 맞춤법을 가르쳤지, 글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조해일 선생의 글을 읽어보면 리얼리즘 경향으로 분류되는 글이 많다. 그러나 선생은 학생들에게 리얼리즘이 최고야,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게 선생이 잘한 점이다. 제자의 개성을 존중한다는 뜻이라고 나는 읽는다. 그리고 문장을 제대로 가르쳐 자신보다 뛰어난 글을 쓴 제자를 만났다는 점이 선생께 축복일지 모르겠다. 그 사람은 김언수다.

    선생은 페이스북에 멱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종지부를 찍지 못했다. 그 멱은 아마, 자본주의의 모순을 파헤치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내가 배운 리얼리즘이란, 세상의 모순 또는 부조리를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선생은 그 지점에서 서성거렸던 것 같다.

    노동자와 함께하라는 조세희 작가의 친구인 조해일 선생,

    대학에서 선생 하며 너무 편하게 있는 건 아니냐며 미안해하던 조해일 선생,

    퇴임하고 노동자와 함께하려 했던 조해일 선생,

    그리고 글쓰기의 기본을 정확하게 가르치려 했던 선생이 기억나는 1주기,

    다시 첫 만남이 생각난다.

    황순원 선생은 없고. 조해일 선생이 있다고 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