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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6-12 16:10:08 / Hit:5878  

1인칭 소설 (7)

‘남빈여관’을 떠나고 나서도 잊혀지지 않는 몇 가지 일이 더 있었다. 고모를 따라 보수동으로 옮겨서 고모에게 얹혀 지낼 때의 일인데 할머니와 고모를 따라 함께 공중목욕탕에 갔던 사건( 고모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으나 할머니가 우겨서 ‘여탕’이라고 씌어진 곳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에 있던 벌거벗은 아주머니들한테서 심한 항의와 비난을 받고 나는 목욕이 끝날 때까지 눈을 감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할머니와 그 아주머니들 사이의 타협의 결과였다. 따라서 나는 성인 여성들의 비뇨기를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을 본받고 할머니의 권유를 받아들여 장사를 해본 일( 당시 많은 아이들이 장사를 했는데 나는 처음엔 목판에 ‘왕사탕’을 받아서 가슴에 안고 다니며 팔다가 다음에는 더 잘 팔린다는 흰 엿, 깨엿, 콩엿, 땅콩엿 같은 각종 엿들을 목판에 안고 다니며 팔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거리나 다방 같은 곳에 가서 팔았고 이 때 나는 장사를 하면 처음에 들인 돈보다 돈이 불어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영도 다리’ 아래 바닷가에서 밥알을 미끼로 ‘복쟁이’를 낚던 일( ‘복쟁이’가 복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아이들은 낚시바늘에 밥알 하나만 끼워서 그것을 잘도 낚았다. ‘복쟁이’는 물 밖으로 나와 땅 위로 던져지면 몸 전체를 공처럼 둥글게 부풀리곤 했고 그러면 아이들은 달려들어 발로 밟아서 터뜨리곤 했다. 나는 내 밥알 미끼를 물고 몸부림치며 물 밖으로 끌려나오는 ‘복쟁이’가 내 손에 전해주던 강렬한 떨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따위가 그것들이다. 물론 고모의 방에서 처음 본 침대라는 커다란 물건( 나는 그 밑에서 잔 적도 있다), 할머니와 나만 따로 영도로 이사 갔을 때 집 앞 골목길에서 자세히 본 조그만 계집아이들의 비뇨기( 그 계집아이들은 치마 속에 속옷을 입지 않고 있었고 골목길에서 아무렇게나 치마를 걷어 올리고는 소변을 보았다. 어떤 때는 내 정면에서 소변을 보았다), 영도로 이사 간 우리 집, 아니 방에 애인(해군이었고 잘 생긴 남자였다)과 함께 와서 자고 난 다음 날 아침, 고모가 아직 자고 있는 그 남자의 뺨과 입술에 몇 번이고 맞추어대던 입맞춤( 나는 그 때 고모를 경멸했던 것같다. 질투심이었을까. 고모는 함께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정도로 멋쟁이였고 또 예뻤으니까), 그리고 그 남자의 뺨에 생겼던 빨간 입술연지 자국, 할머니의 권유로 6개월간 다녔던 단기 야간학교( 할머니는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 그러나 나에게 그 학교에 다닐 것을 권유했고 나아가서는 ‘천자 책’을 사다주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종이에 옮겨 쓰게 하고 나서는 그 종이를 불에 태워 재를 물에 타서 마시게 하기도 했다. 그 학교에서 나는 국어 책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유일한 학생이었다)에서 만난, 땋은 머리카락이 엉덩이에 치렁치렁 닿던 커다란 처녀 학생들도 잊지 못한다. 아, 그리고 연 날리기도 잊지 못한다. 대나무를 구해다 가늘게 쪼개고 다듬어서 연의 살을 만들고 창호지를 마름질해서 밥풀로 붙여 방패연을 만들던 일과 다른 연과 겨루기 위해 사기 조각을 잘게 부숴 고운 가루를 만든 다음 풀에 섞어 연 실에 입히던 일, 그리고 마침내 연을 날려 올렸으나, 꽤 높이 날려 올렸으나 어디선가 떠오른 움직임이 기민한 다른 연과의 단 한 번의 겨룸에서 맥없이 연 실이 잘려 너울너울 하늘 저 쪽으로 날아가던 내 연의 모습, 그 가엾은 모습과 내 손에 느껴지던 얼레의 힘없는 무게를 잊지 못한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형이 있는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형이 있다면 연도 보다 잘 만들 수 있고 연 실에 사기 가루도 더 잘 입힐 수 있으며 연을 다루는 재주도 잘 가르쳐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남부민동에 있는 천마산 기슭에 판자 집을 지은 것은 그 얼마 후의 일이었다. 할머니가 지니고 있던 비상금과 고모가 일부 보태준 돈으로 가능해진 일이었을 것이다. 방 한 칸과 부엌 일 할 수 있는 조그만 공간이 전부인 작고 허술한 집이었는데 그래도 집 앞엔 마당으로 삼을 수 있는 조그만 공터와 소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그리고 집이 세워진 비탈 밑에는 식수를 얻을 수 있는 샘이 있었고 샘 옆으로는 작은 개울이 흘렀으며 그 개울 너머로는 꽤 넓은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 나는 이 집만 생각하면 가슴 속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이 시기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속이 아니 몸속이 환해진다. 내 삶에서 이 시기가 없었더라면 나의 삶이란 얼마나 메마르고 가난한 것이 되었을까. 
나는 물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이는 샘도 처음 보았고 바람에 수많은 이삭이 춤추듯 흔들리는 보리밭도 처음 보았다. 옆에 있는 개울이 말라붙어도 그 샘에서는 조금씩이나마 끊임없이 맑은 물이 솟아올랐고 그 보리밭에서 나는 얼마 후 새로 사귄 아이들을 따라 ‘깜부기’라는 것도 처음 먹어보게 되었다. 그것은 까맣게 타버린 듯한 보리 이삭이었는데 입속의 침이란 침은 모두 빨아먹어버리는 것 같았다. 별로 맛있다곤 할 수 없었으나 약간 고소하기도 했다. 또 나는 새로 사귄 아이들을 따라 개구리도 잡아보고 불에 구운 개구리 뒷다리도 먹어보았다. 처음 개구리를 잡았을 때 나는 낯선 감촉에 놀라 얼른 도로 놓아버렸으나 두 번째부터는 그럭저럭 참아낼 수 있었고 모닥불에 구운 개구리 뒷다리는 꽤 맛있었다.
할머니가 지은 판자 집 말고도 그곳엔 이미 지어져서 피난민들이 살고 있는 다른  판자 집들이 많았다. 천마산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 집은 가장 아래쪽에 있는 셈이었고 다른 집들은 조금씩 위쪽에 있었다. 그리고 그 집들에는 대개 아이들이 있었다. 내 또래 아이들도 있었고 조금 큰 아이들도 있었으며 조금 작은 아이들도 있었다. 사내아이들도 있었고 여자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집 앞의 좁은 마당에서 놀기도 했지만 대개는 동네의 맨 위쪽에 있는 꽤 넓은 공터에 가서 놀았다. 깡통같은 것을 차면서 놀 수 있을 만큼 꽤 널찍한 그 공터에는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있었고 한 귀퉁이에는 제법 커다란 바위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영도 섬이 건너다보였고 방파제의 등대도 내려다보였다. 영도 섬에는 구름이 끼는 날이 자주 있었는데 구름이 끼면 영도 섬은 윗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영도 섬을 가린 구름은 마치 하늘이 잿빛의 부드러운 치마 자락을 드리운 것같았다.
아이들 말고 어른이 그곳에 올라오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따금 그곳에 올라와서 그림을 그리는 아저씨가 한 사람 있었다. 그 아저씨는 구름에 윗부분이 가려진 영도 섬을 그리곤 했다. 때로는 파도가 세차게 때리는 방파제와 등대를 그리기도 했다. 나는 그 아저씨가 화가라고 생각했다. 나도 나중에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조금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아저씨가 그리는 그림과 그리는 과정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그 아저씨는, 나는 아직 써보지 못한 수채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연필로 먼저 소묘를 하고 나서 그 위에 붓으로 물감을 칠하는 것이었는데 물감을 칠한 뒤에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연필 자국이 보기 좋았다. 그 아저씨가 멋있어보여서 나는 나중에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조금 더 굳혔다.
그 공터에 놀러 오는 아이들 중에 남순이라는 내 또래 여자 아이가 있었다. 여자 아이들은 대개 고무줄뛰기를 하며 놀았는데 남순이는 항상 등에 제 갓난쟁이 동생을 업고 와서 놀았다. 갓난쟁이 동생을 등에 업고도 남순이는 누구보다 고무줄뛰기를 아주 잘 했다. 그리고 고무줄뛰기를 할 때 남순이의 얼굴은 약간 빨개지곤 했는데 나는 그렇게 약간 빨개진 남순이의 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사내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이 함께 놀기도 했다. 대체로 내 또래 아이들 끼리나 더 작은 아이들이 있을 때였고 그런 때면 우리는 기차놀이 같은 것을 했다. 저마다 앞의 아이의 허리를 붙잡고 길게 한 줄로 늘어서서 맨 앞의 아이가 이끄는 대로 뛰어다니는 놀이였는데 남순이가 내 앞에 서거나 내 뒤에 섰을 때 나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남순이가 내 허리를 꼭 붙잡았을 때가 물론 더 좋았다. 한 번은 맨 앞의 아이가 갑자기 멈춰 서서 아이들 모두 앞으로 쓰러질 뻔 하다가 간신히 앞의 아이와 몸을 붙인 채 제 자리에 선 적이 있었는데 나는 내 허리를 꼭 붙잡고 내 등에 붙어있는 남순이의 몸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등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기차놀이가 다시 제 자리를 잡았을 때 나는 얼마나 서운했던지...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엔 나는 공터에 올라가 방파제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날엔 파도가 세차게 방파제를 때렸다. 파도는 등대보다 더 높이 솟구쳐 올라서 방파제를 때릴 때도 있었다. 높이 솟구쳐 올라서 방파제를 때리고는 수많은 물방울을 뿌리며 물러가고 다시 솟구쳐 올라서 세차게 때리고는 물보라를 남기고 물러가곤 했다. 그 때마다 어김없이, 나보다 훨씬 큰 아이들이 파도를 뚫고 방파제 위를 달리곤 했다. 적어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형들 같았다. 거의 수영복이나 짧은 반바지 차림의 벌거숭이들이었다.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 공터에선 꽤 먼 거리였지만 나는 파도를 뚫고 달리는 그 아이들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떤 때는 파도에 가려 달리는 아이의 모습이 사라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곧 다시 나타났다. 등대가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파도가 높이 솟구쳐 오를 때를 기다려서 달려 돌아오곤 했다. 그 때마다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하기도 했고 두근두근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도 파도에 휩쓸려 방파제 너머로 날아가는 아이를 본 적은 없었다. 나는 그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람이 심한 날에는, 우리 집은 몹시 흔들렸다. 집 가까이에 있는 소나무에 할머니가 철사 줄로 여러 번 꽁꽁 묶어 놓았지만 당장 날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흔들렸다. 그런 날 밤에는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러나 집이 바람에 날아간 일은 없었다.

내가 헤엄치는 법을 배운 것은 송도 해수욕장에서였다. 우리 집에서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 개울을 끼고 조금 걸으면 큰길이 나왔는데 그 길을 건너서 남쪽으로 바로 내려가면 방파제로 갈 수 있었고 길을 건널 필요 없이 서쪽으로 한동안 더 걷다가 다시 남쪽으로 얼마간 걸어 내려가면 송도 해수욕장이 있었다. 그 큰길을 우리는 ‘송도 윗길’이라고 불렀고 차가 다니는 부분만 아스팔트로 포장된 2차선 도로였다. 한여름 철이면 아스팔트가 눅진눅진 녹아서 자동차의 바퀴 무늬가 또렷이 찍히곤 했다. 차가 다니는 부분을 빼고는 비포장 흙길이었으므로 걸어가노라면 발밑에서 먼지가 풀석풀석 일었다. 나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그 먼지 나는 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송도 해수욕장에 가곤 했다. 그곳에 가면 탁 트인 넓은 바다와 수평선이 보였고 바다를 따라서 길게 모래밭이 이어져 있었다. 맑은 날에는 수평선 너머로 희미한 섬 하나를 볼 수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것이 일본의 ‘대마도’라고 했다.
송도 해수욕장의 바다는 아주 얕았다. 물속으로 한참이나 걸어 들어가도 물이 가슴께 밖에 차지 않았다. 나는 물론 물이 턱에 닿는 곳 이상은 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얼굴을 물속에 묻은 채 조금씩 헤엄치곤 했다. 왜냐하면 얼굴을 쳐드는 순간에 즉시 가라앉곤 했으니까. 그러나 얼굴을 묻은 채라곤 해도 내가 헤엄칠 수 있는 거리는 조금씩 길어졌다. 차차 물속에서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있게 되었는데 물속에 떠다니는 해초 따위도 이따금 볼 수 있었고 다른 아이들의 움직이는 몸뚱이와 물속으로 비쳐든 햇빛이 그 아이들의 몸에 그려내는 일렁이는 무늬도 볼 수 있었다. 헤엄치는 속도도 조금씩 빨라졌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나는 팔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면 얼굴을 쳐들어도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내 몸이 스스로 알아냈다. 이 때 마음속으로 얼마나 환호했던지.
이후 나는 제법 개구리 흉내를 내면서 헤엄칠 수 있게 되었고 물 위에 누워 배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 위에 편안히 누워 발만 조금씩 젓고 있으면 가라앉지 않았다. 또 물속으로 머리부터 자맥질해 들어가 모래 바닥을 만져볼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젠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곳으로 조금 들어가도 그다지 겁나지 않았다. 그러나 결코 멀리 들어가진 않았다.
물속에 오래 있으면 추워졌다. 그러면 모래밭으로 나와서 햇볕에 따가와진 모래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햇볕을 쬐었다. 햇볕은 금새 물기를 말려주고 살갗 속속들이 파고들어 몸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내 또래 아이들 중 수영복을 입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대개 ‘사루마다’라고 불리던 헐거운 옥양목 팬츠 차림이거나 아니면 아예 벌거숭이였다. 나보다 더 작은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거의 모두 벌거숭이들이었다. 계집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엉덩이를 꽉 죄는 수영복을 입는 것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같은 큰 형들이었다. 그 형들 중에는 팔뚝이나 가슴에 우람하고 멋진 근육을 가진 형들도 있었다. 움직일 때면 그 근육은 마치 따로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아이들은 경탄하면서 그런 형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형들은 대개 천천히 걸어갔다.
“ 우와, 바아라, 삼각형이제?”
아이들은 작은 소리로 말하며 감탄했다.(부산의 아이들은 무슨 음악처럼 말을 했는데 억양의 높낮이가 재미있어서 나는 곧 그 아이들의 말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어깨와 가슴의 근육은 크고 우람한 대신 허리는 잘록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는 아직 역삼각형이라는 말을 몰랐다. 그런 형들 중에는 모래밭에서 멋지게 물구나무를 서는 형도 있었다. 꼿꼿이 물구나무를 서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물구나무 선 채로 두 손을 움직여 걷기도 했다. 또 그 형들은 대개 멀리까지 헤엄쳐 나갔다. 누군가가 말하던 기억이 난다.
“ 여어서 혈청소까지 헤엄치가 가는 사람도 있다카드라”
혈청소는 송도 해수욕장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산자락을 돌아서도 한참 더 가야 하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했다. 나는 혈청소까지 가보진 못했지만 나중에 송도 해수욕장을 벗어나 그 서쪽 산자락 밑의 바닷가에 가서 헤엄치며 놀아보기는 했다. 그곳엔 모래밭은 없고 바위들만 있어서 몸을 말릴 때도 바위 위에서 말려야 했다. 그리고 물속에도 바위들만 있었다. 아니다. 바위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위들 사이에 여러 가지 낯선 모양과 빛깔의 해초들이 있었고 작고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있었다. 그 물고기들은 아주 선명하고 예쁜 무늬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나 빠른지, 몇 번 손으로 잡아보려 했으나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다. 두 눈을 한꺼번에 가리는 커다란 물안경을 쓰고 기다란 작살을 가진 형들도 내가 잡으려던 물고기를 잡아가지고 나오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 형들이 잡아가지고 나오는 물고기들은 대개 몸집도 크고 빛깔이나 무늬도 결코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쩌면 그 형들한텐 그 작고 아름다운 물고기들은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모래밭 대신 바위들만 있는 바닷가는 그곳만이 아니었다. 방파제에서 송도까지 이르는, 우리가 ‘송도 아랫길’이라고 부르던 비포장도로를 끼고 있는 바닷가도  그런 바위들만 있는 곳이었다. 나는 나중에 송도 해수욕장보다 이곳에서 더 많이 놀았다. 그곳의 바위들은 널찍하고 평평한 것이 많아서 아이들이 놀기에 좋았다. 그리고 바다 속에는 볼 것이 아주 많았다. 여러 가지 해초들과 작고 예쁜 물고기들은 물론, 밤송이처럼 생긴 성게도 있었고 바위에 붙어있는 작은 소라들과 홍합 조개, 별 모양으로 생긴 불가사리와 여드름투성이 멍게도 있었다. 조그만 밤송이처럼 생긴 성게가 제 몸의 무수한 바늘을 다리처럼 움직여 자리를 옮겨가는 것도 나는 보았다. 어쨌든 그곳 바다 속에는 땅 위에서 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었다.
차츰 바다에 대한 두려움이 작아진 나는 방파제에 가서도 놀았다. 그곳에도 바위들이 많았고 바다 속엔 볼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곳은 가장자리부터 깊었다. 처음에 나는 쉽게 헤엄쳐 되돌아올 수 있는 가장자리에서만 놀았다. 깊이가 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깊이에 차차 익숙해지자 그 깊이가 헤엄치기에는 더 좋은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몸이 그것을 알고 좋아했다. 송도 해수욕장의 얕은 바다 속에서보다 그곳에서 내 몸은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 헤엄치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점점 멀리 헤엄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내 또래 아이들은 엄두도 못 낼 만큼 멀리 헤엄쳐 나갔다. 멀리 나갈수록 내 몸은 더 가벼워졌다. 그것이 깊이가 더해졌기 때문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그래서 겁도 났지만 몸이 아주 가볍게 떠있는 기분은 그리고 바닷물에 부드럽게 감싸여있는 기분은 두려움을 잠시 외면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햇빛이 바다의 빛깔을 아주 투명한 푸른색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 바닷물은 한 때 나를 골탕 먹인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나를 한껏 자유롭게 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낯설고 두려운 어떤 것이 아니라 나에게 아주 친숙하고 우호적인 것이었다. 나는 내가 있었던 어떤 공간보다도 바다 속에 있는 것이 편안하고 자유롭게 느껴졌고 그 느낌이 좋았다. 바다와 나 사이에 서로 비밀이 없어진 것 같았다. 바다와 나 사이에 비밀이 없어졌으므로 나는 마음 놓고 내 고추를 만졌다. 고추를 만지면서도 물론 헤엄칠 수 있었다. 고추는 딱딱하게 커졌다. 기분이 좋았다. 바다는 내 비밀을 말없이 지켜주었다.
나는 점점 더 멀리 헤엄쳐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마음만 먹는다면 한없이 헤엄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가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있었으므로. 바다는 한없이 너그럽고 나는 가벼웠으므로. 그러나 차츰 거리에 대한 두려움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더 멀리 나갔다가는 되돌아갈 수 없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벌써 방파제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는 더 헤엄쳐 나가고 싶은 욕심을 누르고 천천히 방파제로 되돌아왔다. 방파제에는 아이들이 건져 올린, 별 모양의 불가사리들이 여기저기 던져진 채 햇볕에 말라가고 있었다. 햇볕에 말라가는 불가사리들의 빛깔은 마치 이상한 피부병에 걸린 사람의 살갗 같아서 결코 곱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의 내겐 그 불가사리들도 밉게 보이지 않았다.
헤엄치고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는 보리밥을 차려주었다. 쌀이 한 톨도 섞이지 않은 보리밥이었다. 반찬은 고추장뿐이거나 된장과 그 된장에 찍어먹을 대파 줄기가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헤엄치고 돌아와서 먹는 보리밥은 늘 맛있었다. 밥알 알맹이 하나하나가 까끌까끌 입속에서 느껴지는 보리밥이었지만 늘 맛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왔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빛바랜 군복 차림의 아버지는 어깨에 군대용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내겐 아주 낯선 모습이었다. 얼굴빛도 전보다 더 검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 아이구, 이 자식아. 아이구, 이 자식아. 네가 살아 오다니”
하고 얼싸안는 할머니의 두 팔에 갇혀서 아버지는 울었다. 아버지와 할머니 두 사람은 그 날 두고두고 울었다. 무슨 얘기 끝에도 울고 어떤 웃음 뒤에도 다시 훌쩍훌쩍 울었다. 고모와 용하게 편지 연락이 닿아 찾아올 수 있었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고령 만기제대’라는 어려운 낱말을 아버지한테서 들었다.



'들녘'에 올렸던 것을 이곳에 옮겨왔다. 그럴만한 이유가 약간 있었다. 내 '하드'가 못 쓰게 돼서 저장했던 것들이 모두 날아갔다. 이곳에라도 옮겨둘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이 곳에 내 못난 소설도 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옮기면서 부분적으로 약간 손질한 곳이 있으나 대수로운 건 아니므로 굳이 확인할 것까진 없겠다. 짬을 봐서 뒷 이야기를 써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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