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신승철

 2007-12-28 14:52:51 / Hit:45763  

낙서, 음화 그리고 비총(鼻塚)

  미래에는 말이죠, 사람들이 코에 안대를 끼거나 방독면을 쓰고 나체로 해변을 걷게 되는 시대가 올겁니다. 김기자는 직행버스가 전주 시외버스터미널을 빠져나가자 웃음기 어린 얼굴로 우스갯소리를 한다. 콧물이 계속 목 뒤로 흐르는 것 같고 뒤통수의 한 부위가 심하게 아파오자 나는 목을 뒤로 젖히고 입을 살짝 벌린다. 그러다가 나는 김기자가 오래 전에 코에 붕대를 붙이고 다니던 모습이 떠올라 미소를 짓는다. 다방을 나와 격포해수욕장행 시외버스에 올라탄 후부터 김기자는 들뜬 마음을 굳이 감추려하지 않는다. 이른 봄철이라 그런지 해수욕장행 버스에는 승객들이 많지 않아 한두 칸 건너 빈 좌석이다.
  어디서 내려야 하지? 부안이요. 거기서 비총(鼻塚)까지는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면 될 겁니다. 생각해 보니 김기자의 ‘코타령’을 근 일 년만에 다시 듣게 된 셈이다. 그의 코타령은 대개 이런 식이다. 성기를 망측한 것으로 여기는데 알고 보면 코처럼 망측한 부분도 없다. 사람의 몸에는 진화가 덜 된 부분에 털이 남아 있기 마련인데 콧속에는 털이 있고, 누런 콧물이 들락거리기도 하며, 더러는 피가 나오기도 한다.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치마를 만들어 음부를 가렸다는데 사실은 망측한 코를 가렸어야 옳다. 그러니 해변가에서는 사람들이 음부를 가릴 게 아니라 코에 안대를 붙이거나 방독면만 쓰고 다니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이 김기자의 주장일 것이며, 그와는 한때 같은 신문사에서 선후배로 절친했던 사이라 내가 그 의도를 모를리 없다.
  햇살이 얼굴을 찔러와 나는 거수경례를 하듯 한쪽 손을 눈썹에 바짝 대고 날을 세운다. 정선배, 저 여자 왜 쫓아오는 겁니까? 보기 드문 미인인데 말씀이야. 손수건을 꺼내어 코를 풀려는 순간 후배가 건너편 좌석으로 턱짓을 하며 불쑥 내던진 말에 동작을 멈추고 만다. 때문에 나는 코 주위에 손수건을 덮어 양손으로 싸 쥔 채 고개를 돌려 건너편 좌석에 깊이 몸을 묻고 잠들어 있는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밤색 가죽점퍼를 목 언저리까지 지퍼를 끌어올려 입고 머리를 좌로 꺾은 자세로 곤하게 잠들어 있다. 내처 사납고 모질게 코를 풀고는 손수건을 바지 뒷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는다. 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후배는 짐작이 가는 일이 있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린다.
  입으로만 숨을 쉬어서 그런지 목 속이 건조하게 느껴진다. 이러다간 인두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무래도 혈관수축제라도 사서 콧속에 뿌려야 할 판이다. 직장에는 휴가원을 내고 화장실을 찾아다니며 벽에 그려진 음화나 낙서들을 사진기로 촬영해 온지 두 달째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고통스럽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축농증의 재발이 한몫 거든 면이 있다.
  사실 음화나 낙서를 사진기로 담는 작업에 대해 특별한 의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신 의학적으로나 사회학적, 혹은 철학적 분석 능력이 있다면 모를까, 나의 행위는 아내의 말처럼 ‘미친 짓’이 적절한 표현인지도 몰랐다. 아내의 불만이 아니더라도 일련의 행동들이 ‘미친 짓’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가령 한 사람이 낙서를 하면 다른 사람은 거기에 대해 평가를 한다든가 아니면 면박을 주는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반정부 구호가 그렇고 성에 대한 노골적인 용어들, 그리고 성행위 장면을 과장되게 그린 음화들이 실제로 큰 의미가 있다한들 누가 보더라도 터무니 없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비총에는 뭐가 있지? 코가 있기나 한가? 느닷없는 질문에 후배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돌아본다. 나는 후배의 시선을 외면한 채 잠들어 있는 여자를 응시한다. 여자가 잠들어 있는 좌석의 차창 밖으로 드넓은 논이 나타나고 그 위를 아직 녹지 않은 흰 눈이 듬성듬성 덮고 있다. 어디선가 흙 냄새가 난다.
   
  천장 중앙에는 끝이 꼬부라진 백합 모양의 전등 네 개가 매달려 있다. 꽃망울을 빠져나온 불빛은 사방으로 드넓게 퍼져 다방의 실내를 훤히 밝히고 있다. 탁자 위에는 통꽃 모양의 커피 잔이 놓여 있고, 그 잔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오른 손으로 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본다. 막 잔디를 깎고 난 후에 풍기는 풀 냄새가 난다. 사장님은 여그 사람이 아닌갑이요. 쬐깜 앉아도 되제라우? 미처 말리기도 전에 여자는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인데도 어깨가 많이 드러나고 목 언저리가 푹 패인 흰색 면티를 입은 다방여자는 어느 새 요구르트를 손에 든 채 대롱으로 쪽쪽 빨아 먹는다. 요구르트 병을 잡고 있는 여자의 손가락 끝에 흑장미색 메니큐어가 묻어 있고, 대롱을 물고 오므린 입술에도 엇비슷한 색깔의 루즈가 묻어 있다.
  오메, 무신 코창시 터지는 냄새다요? 여자가 갑자기 코를 싸 쥐고 허리를 숙인 채 바닥의 이 곳 저 곳을 살핀다. 영문을 몰라 나는 덩달아 바닥으로 시선을 옮긴다. 청색 미니스커트 아래로 뻗은 여자의 하얀 맨다리는 스산하다. 언뜻 여자의 봉곳한 젖가슴이 눈에 들어온다. 사장님, 오바이트했제라우? 여그 가방 잠 보씨요! 어따어따 추접시런거. 아닌 게 아니라 여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카메라 가방 밑바닥에는 밥알을 짓이긴 듯한 점액질이 흥건히 묻어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가방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제서야 생각이 난다.
  서울에서 전주까지 달려오는 고속버스 속에서 줄곧 잠에 빠졌던 나는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물로 코를 풀었었다. 콧구멍이 헐어 휴지나 손수건으로 닦아내는 것은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 코를 닦아내고 화장실의 벽에 그려진 음화를 사진기로 촬영하려고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던 기억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때 묻은 모양이었다. 두어 달 전에도 비슷한 경우를 당한 적이 있었다.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의 화장실을 뒤져 벽에 그려진 음화와 낙서의 촬영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카메라 가방의 한쪽 귀퉁이에 묻어있던 똥을 발견한 아내는 숫제 비명을 질렀다.
  누굴, 기다린다요? 일회용 물수건을 건네주며 다방 여자가 묻는다. 물수건까지 가져다주는 여자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기도 해서 웃는 낯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린다. 그리고는 킁킁거리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보지만 두통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때문에 여자는 손님이 온다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아가씨, 이름은 뭐요? 물수건으로 가방의 밑바닥을 문지르며 여자의 얼굴을 곁눈질로 살핀다. 다방여자는 짙은 화장에 살이 많이 드러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십대 후반쯤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름은 어따 쓰실라요? 그냥 미스 홍이라고 부르먼 좋겄구만이라우. 미스 홍은 코가 참 이쁘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자는 한쪽 손으로 나발을 불듯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으려고 애를 쓴다. 왜 이러나 싶어 나는 옷 매무시를 살핀다. 사장님은 코가 징하게 크요잉. 코가 크먼 그것도 크다등만…. 여자는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는 배를 부여잡고 깔깔거리기 시작한다.
  이 커피 잔, 냄새 좀 맡아 볼래요? 미스 홍이 웃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묻는다. 무슨 풀 냄새가 나지 않아요? 미스 홍은 얼른 웃음기를 지우고 머리를 쑥 내밀어 내가 내민 커피 잔에 코를 갖다 댄다. 커피 잔에서 커피 냄새가 나제 무신 냄새가 난다고 엄한 사람을 잡을라고 해샀오?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미스 홍이 쏘아 붙인다. 내가 다시 커피 잔에 코를 갔다대려는데 여자의 등 뒤 출입구 쪽에서 낯익은 얼굴의 사내가 맨질맨질한 대리석 바닥 위로 뚜벅뚜벅 소리가 나게 걸어오면서 손을 들어 보인다. 나는 후배 김기자를 금방 알아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덩달아 한쪽 손을 든다.
  오랜만이군, 김기자. 취재하느라 바쁜 거 아냐? 오메, 기자분들이씨요? 미스 홍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진다. 바로 나가죠, 뭐. 김기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빠른 어조로 말한다. 김기자는 어디서 운동을 하고 오는지 테니스 라켓 가방을 어깨에 끼고 있다. 나는 할 수 없이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짊어 메고 김기자를 앞질러 계산대로 걸어가 커피와 요구르트의 값을 치른다. 막 다방문을 밀치고 나서려는데 뒤따라 나온 미스 홍의 말이 귓속을 파고든다. 사장님! 나가 뒤따라 갈팅께 지달리씨요, 알았제라우? 그녀가 빠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혹시 다른 사람에게 수작을 거는가 싶어 나는 뒤를 돌아본다. 나와 눈이 마주친 미스 홍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뜨고는 다방문 안으로 훌쩍 사라진다. 

  숱이 적은 머릿속처럼 나뭇가지만 남은 동산이 넓은 들의 군데군데에 낮게 엎드려 있다. 운전사가 난방장치를 세게 틀어놓았는지 좌석에 밀착된 등짝과 허벅지 부근에 땀이 스밀 정도로 버스의 실내는 후덥지근하다. 더욱이 차창으로 비껴 들어온 햇살에는 제법 높은 온기가 실려 있다. 머리 오른쪽 끝이 바늘로 콕 찌르는 듯해 나는 짧게 머리를 흔든다.
  내가 음화나 낙서를 찾아서 지하철의 화장실로 장소를 옮겨 사진 촬영에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 지방 주재기자로 발령이 나 전주에 머물고 있던 김기자의 전화가 걸려 왔었다. 그것도 새벽 2시가 넘어 술취한 목소리로.
  ‘코에 대한 역사의 현장이 있다 그 말입니다. 코 비, 무덤 총. 비총이요, 비총! 정선배하고 나하고는 냄새상실증 환자 아닙니까. 당연히 가봐야지요.’
  술에 취하면 전화를 걸어왔던 김기자는 매번 비총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꼭 가봐야 한다고 졸랐었다. 1년 전 김기자는 중증의 축농증 환자였고, 축농증 병력을 지닌 내가 서로 가까와지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냄새 상실증 환자. 김기자가 무심코 내뱉은 그 말. 어쨌거나 그 단어가 풍기는 어감에 나는 적이 놀랐다. 비총을 가보고 싶다는 의욕은 둘째치더라도 성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난 사람처럼 언짢았던 것이다.
  정선배, 변강쇠와 옹녀 아시죠? 김기자가 갑자기 잠들어 있는 미스 홍에게 눈길을 주며 내게 묻는다. 가루지기 타령에 등장하는 변강쇠와 옹녀가 처음 상면을 할 때 상대방의 코의 모양을 보고 대번에 성 기능을 짐작했다는 거예요. 오른쪽 콧구멍 부위를 난대(蘭台)라고 하고 왼쪽 콧구멍 부위를 정위(廷尉)라고 하는데요, 변강쇠가 옹녀의 벌렁거리는 난대와 정위를 보고 옳거니, 하면서 감탄을 했다는 겁니다. 또 옹녀는 변강쇠의 두 눈 사이에 솟은 콧대인 근산(根山)과 콧끝 부분인 준두(準頭)가 굵직하게 솟아 있고 긴 것을 보고 옳거니, 하고 탄성을 내지르는 장면이 나와요.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은 코를 보고 그대로 성기를 알아볼 수 있었다는 얘기죠. 내게 설명을 늘어 놓던 김기자는 다시 미스 홍에게 시선을 옮기면서 나지막하게 말한다. 저 여자, 난대하고 정위가 벌름거리는 것 좀 보세요. 모르긴 해도 저 여자 밤이 무서운 여자일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김기자는 혼자서 소리 죽여 웃는다.
  한때 나는 김기자가 코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 이유를 되새겨 본 적이 있다. 내가 문화부에서 연극 담당 기자로 수습 기간을 끝내고 경제부 중소기업1팀으로 옮겨간 반면 김기자는 정해진 경찰서에서 기식을 하다시피 취재를 해야 하는 ‘하리꼬미’로 수습을 마쳤다. 어쨌거나 내가 순탄한 기자 생활을 겪었다면 김기자는 야전 사령부 기자에 속했다. 여배우의 죽음을 타신문사 대다수의 기자들이 약물중독에 의한 자살로 보도한 사건을 김기자는 데드라인을 넘겨가며 타살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여 보도함으로써 능력을 인정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한 그가 시위 현장을 넘나들면서부터 코에 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그는 늘 말하곤 했다. 축농증에 걸렸데서 하는 얘기가 아니구요, 난 역사의 피해자다 그 말입니다. 자고로 80년대는 코가 혹사당한 시대가 아니냐구요. 시위 현장에서 터지는 최루탄은 최루탄이라기보다 콧물탄이라니깐….
  직행버스는 빠른 속도로 국도를 달린다. 이총(耳塚)은 들어봤지만 비총은 처음듣는데? 김기자는 졸음을 쫓으려는 듯 머리를 짧게 여러 번 흔든다. 원래는 천비총(千鼻塚)이라는 명칭으로 일본 오까야마현 비젠시라는 곳에 있었답니다. 정유재란 때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한민족의 기를 자르려고 조선 의병과 양민의 시신에서 코를 베게 했다죠, 아마. 그 코를 소금에 절이고 백 개 단위로 새끼줄에 꿰어 나무상자에 담아 전리품으로 삼게 했다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으로 돌아간 병사 하나가 오카야마현 비젠시 야산에 코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왔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우리 나라 유학생이 일본에서 이를 발견했고 4백여 년만에 코무덤을 고국으로 옮겨왔다는 거예요. 이총이라는 게 있잖아? 맞아요. 일본놈들이 임진왜란 때는 귀를 잘라 갔고 더러 코도 잘라가 이총을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가보지는 않았지만 경남 사천에 이총을 옮겨와 안치했답니다. 정유재란 때는 코를 집중적으로 베어간 셈이죠.
  낮은 각도로 차창을 비껴들어온 햇살, 그리고 건조한 실내 공기 때문에 나는 숨이 막혀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건너편 좌석에 여전히 잠에 골아 떨어져 있는 미스 홍이 시선에 들어온다. 짧은 시간에 깊게 잠든 여자의 모습은 몹시 지쳐 보인다. 코의 난대와 정위가 벌름거리는 모양은 영락없이 가루지기타령의 옹녀인 여자. 나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창 밖을 바라보며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는다. 손가락 끝으로 성기를 잡아보지만 영 힘이 없다. 왼손을 빼어 손목시계를 보니 4시를 넘어서고 있다.
  지방에 내려오니까 가장 속 편한 게 뭔지 아세요, 정선배? 보기 싫은 인간 안 보는 겁니다. 김성교 부장 그 십새끼는 여전한가 몰라.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김기자는 말한다. 그리고는 김기자는 한결 목소리를 낮춘다. 그런데 말입니다. 가장 불편한 게 뭔지 아세요? 일이 없으니까 심심한 거예요. 전원 풍경, 다 웃기는 소립니다. 장가라도 가면 좀 나을래나.
  어쩌리라는 계획도 없이 신문사에 장기 휴가원을 내고 화장실에 그려진 음화나 낙서를 사진기로 촬영하는 작업에 매달려 있을 때 가장 부담스러운 존재는 당연스럽게도 아내였다. 그릇에서 풍기는 풀 냄새에 대해 아내는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이비인후과 개인 병원에서는 정신과 치료를 권했고, 정신과 의사의 끝없는 질문에 질려 그도 그만두었다. 폭음과 늦은 귀가, 그에 따른 잠자리 속에서의 발기 부전(勃起不全)을 일삼는 내게 아내는 침묵으로 대했다. 흔히 말하는 신혼의 단꿈을 접어두고 감당할 길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아내에게 나 또한 침묵으로 대했다. 내가 촬영 장비와 필름 현상 장비를 하나씩 늘려가면서 통장에 저축된 돈을 축내도 아내는 침묵을 지켰으니 아내가 더 참을성을 발휘했는 지도 몰랐다. 우연히 화장실에 그려진 음화나 낙서를 사진기로 담아보면 재미있겠다 싶어 시작한 일이 ‘화장실 작업’이었다. 처음부터 사진을 찍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고, 그저 습관대로 낙서를 읽어보는 데 만족했었다. 가령, 누군가가 화장실 벽면에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라고 낙서를 해놓으면 그 밑에는 ‘코가 크면 콧구멍이 크다’가 붙고, 그 다음에는 ‘코가 크면 좆이 크다’가 따라붙고, 마지막에는 ‘좆퉁수 불고 자빠졌네’가 뒤를 잇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80년대와 달라진 점은 반체제나 반정부 일변도의 낙서가 시들해졌다는 점이었다. 그 자리를 청춘과 개인적인 고뇌가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낙서를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공중 화장실은 음화와 음담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나의 시선을 끈 낙서와 음화가 있었다. 여자가 성기를 드러낸 채 뒤로 벌렁 누워 있는 음화 밑에 ‘당신은 인류의 위대한 창문을 열어두고 있군요’라고 적혀 있었다. 그 그림 바로 옆에는 손이 남자의 성기를 움켜쥐고 있는 조잡한 음화가 부분적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그 밑에는 ‘당신은 인류의 미래를 움켜쥐고 있군요’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대번에 감격했고 그 길로 사진기를 구해 와 정신없이 촬영했다. 나중에야 그 그림과 낙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낙서 모음집에서 도용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때 받은 감동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단층 건물들이 도로 양쪽으로 이어지는가 싶더니 직행버스가 부안 번화가로 진입하고 있다. 이윽고 버스는 터미널 입구로 기우뚱거리며 들어선다. 차가 완전히 멈추자 테니스 라켓 가방을 어깨에 끼고 일어 서서 출입구 쪽으로 나가려다가 김기자가 그때까지도 잠들어 있는 미스 홍을 깨우려고 손을 가져간다. 그때 내가 김기자의 어깨를 잡는다. 그 여자 깨우지 말아. 때문에 김기자는 멈칫한다. 왜요? 그냥 우리끼리 가자구. 내가 억지로 떠미는 바람에 김기자는 출구쪽으로 몸이 기운다. 미스 홍에게는 미안한 일이긴 했으나 우리는 서둘러 버스에서 내린다.

  수습 기자들의 환영회가 있었던 날, 나는 입사 후 처음으로 편집국장의 집을 방문했다. 방문했다는 말은 얌전한 표현이었고 술에 억병으로 취해 쳐들어간 셈이었다. 사회부 김성교 부장의 우격다짐과 늦게 결혼하여 젊은 아내와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 국장의 호기가 맞아떨어져 열세 명이나 되는 편집국 기자들은 승용차 두 대와 택시를 대절해 나누어 타고 출발해 강남의 한 빌라 앞에 도착했었다.
  거실로 안내되어 술상을 받게 된 우리들은 책상 다리를 한 채 둘러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들 중에는 수습 기자가 둘이 남아 있었는데 술자리를 옮겨다니면서 눈에 거슬릴 정도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가 바로 김기자였다. 김기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운동권에서 부르는 가요를 부르고 있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끝나면 ‘오월의 노래’가 이어지고, 이제는 끝나는가 싶으면 다시 ‘농민가’가 뒤를 이었다. 자네는 거기에 앉지 말고 여기에 앉게. 국장에게 형님이라는 호칭을 반복하면서 바쁘게 술잔을 비우던 김성교 부장이 김기자를 지목한 것은 소주 잔에 양주를 따라 맥주 잔에 빠뜨려 마시는 흔히 말해 폭탄주라는 것을 순서에 따라 돌려 마실 때였다. 김부장이 앉으라는 곳은 자신의 옆자리가 아니라 무릎 위였기 때문에 노래를 멈추고 김기자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 이 친구 이거 안 되겠는데요. 모두의 시선이 국장에게로 쏠렸고, 국장은 그저 미소를 짓고 있을 뿐 말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국장의 눈치를 살피던 김기자는 체념한 듯 김부장에게로 다가가 그의 무릎 위에 마치 화장실 변기에 쭈그리고 앉은 자세를 취했다. 이 친구야 괜찮아. 편하게 힘주어 앉으라구. 김부장이 그렇게 말하자 김기자는 더욱 어쩔 줄 몰라 몸을 버둥거렸다.
  이놈의 똥강아지. 어디서 술주정을 부려! 김부장이 양손으로 김기자의 머리를 낚아채어 김기자의 코를 물어 버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바람에 김기자는 뒤로 나동그라져 코를 움켜쥐었고, 그 상황에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편집국장과 김부장 뿐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김기자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없었고 관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와 마주칠 기회도 드물었거니와 김부장의 행동을 특별한 것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상습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취재를 끝내고 편집국으로 돌아오던 김기자와 단 둘이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있었다. 정선배, 김부장…어떤 사람입니까? 김기자의 느닷없는 질문이 막연하다는 생각이 앞서기도 했지만 그가 김부장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김부장 그래 보여도 너그럽고 화끈한 사람이야. 술도 잘 사주지, 상사 잘 모시지, 부하 직원 감싸주지, 돈 잘 쓰지. 인간성 괜찮은 사람이라구. 김기자는 내가 내뿜는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료실에 들릴 일이 있었던 나는 중간에 내렸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려는 찰나에 코에 안대를 붙이고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김기자에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기자, 내가 한 말 반대로만 생각하면 돼. 알겠지?

  기자들은 능력 있응께 영화배우도 시케주지라우? 택시가 시외 버스 터미널 출입구를 지나 우회전을 하더니 국도를 따라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다. 택시 앞좌석에 앉은 미스 홍이 내던진 말에 김기자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팔짱을 낀다. 그대로 떠나 버릴 줄로만 알았던 직행 버스가 갑자기 멈추고 가죽 점퍼에 짧은 청색 미니스커트 차림의 미스 홍이 버스에서 뛰어 내렸다. 우리가 택시를 잡았을 때도 미스 홍은 넉살 좋게 택시 앞좌석에 냉큼 올라탔었다. 이거봐 아가씨,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팔짱을 끼고 있던 김기자가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자씨들은 기자람서요? 보시기에 우짤지 모르제만 넘들이 나보고 여배우 해보라고 을매나 이약을 했쌌는지 모를 거이요. 콧속에 혹이나 코버섯이 생겨 구멍을 막아 버렸는지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 택시 앞좌석에 앉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는 미스 홍을 대하자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진다. 아가씨는 코가 이쁘니까 아마 성공할 거야. 김기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찬다. 글제라우? 나가 코 이쁘단 소린 귀딱지가 생기도록 들었당께요. 택시 운전수가 미소를 짓는 것이 반사경을 통해 보인다. 어디선가 흙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제서야 나는 깜짝 놀란다. 평소에 코 먹는 소리를 길게 한 번 내고 두 번 정도 짧게 킁킁 소리를 반복하던 김기자가 지금은 그런 증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때까지도 김기자에게서 축농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까맣게 몰랐다니.
  축농증 때문이었을까, 김기자는 코에 대한 상식이나 지식이 남달라 나를 놀라게 했었다. 가령 미술사가들은 미술작품에서 들창코는 미숙과 우둔함을 표시할 때 그려 넣었으며, 매부리코는 강자나 사악한 인물을 나타낼 때, 그리고 길고 좁은 코는 지성적인 인물을 나타낼 때 흔히 묘사됐다고 김기자는 말했었다. 또한 그는 넓고 짧은 코는 야망적인 인상을 부여할 때, 짧고 작은 코는 귀여운 인상을 심으려 할 때 그림에 그려 넣었다는 둥 제법 설득력 있는 말들을 늘어 놓곤 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김기자는 조각가 로댕이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때 당시 상류 사회의 문란한 성 풍속도를 풍자하기 위해 <코가 일그러진 사나이>라는 조각 작품을 완성하여 살롱에 전시하려 했으나 상류 사회 인사들의 완강한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분명, 김기자를 의식한 탓이었겠지만 나도 코에 대한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었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구입한 <꿈해몽 입문>이라는 책에는 코에 대한 해몽이 제법 많았다. 코가 높아 보이는 꿈을 꾸면 흉하고 구설이 끊일 때가 없다고 적고 있었으며, 코가 썩어 떨어지는 꿈은 거주에 대한 고생이 있고, 코가 평소보다 길어 보이는 꿈은 부귀를 얻을 징조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코가 두 개 있는 꿈은 남과 싸울 징조고, 코가 커 보이면 남의 미움을 사고, 코가 유난히 큰 사람을 보면 물질 등 모든 면에서 풍요로운 사람과 접촉할 일이 생긴다고 했다. 코가 유난히 작은 사람을 본 꿈은 사회적 지위나 가난한 사람과 관계할 일이 생긴다고 풀이했고, 코를 다치게 된 꿈은 남과 크게 싸울 일이 생기거나 누구로부터 중상 모략을 입게 된다고 했다. 내가 이러한 내용을 김기자에게 설명했을 때 그는 동지를 만난 듯 감격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러나 나는 김기자가 설명하는 코에 얽힌 지식이나 이야기에서 지나친 편견을 읽어 냈을 뿐 특별히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국도를 무섭게 달리던 택시가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멈춰 선다. 무슨 일입니까? 차에 이상이 생겼다고 생각하고서 내지른 나의 목소리에 되레 운전사가 놀란 눈치다. 다 온 거예요. 운전사대신 후배가 대답한다. 택시로 불과 십 분 정도를 달려왔을 뿐이다. 나는 차문을 연 다음 밖으로 나서려다가 다시 주저 앉는다. 점퍼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내려는데 후배가 막무가내로 밀어낸다. 나는 차 밖으로 밀려나와 주변을 살핀다. 동산 뒤로 국도가 오른쪽으로 급하게 휘감겨 이어지는 지점에 택시가 정차해 있다. 국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벗어난 길에 승용차가 겨우 들어설 만큼 폭이 좁은 데다가 포장이 되지 않은 진입로가 십미터 가량 이어진다. 그 뒤로는 돌제방과 누렇게 색이 바랜 잔디가 반씩 수평으로 나누어진 언덕이고 언덕의 군데군데에 눈이 남아 있다. 언덕은 또한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에 언덕을 오르는 돌계단이 보인다. 2층 계단이 끝나는 곳의 정면에는 커다란 묘비가 우뚝 서 있고 그 양쪽에는 키가 작은 두 개의 석등이 세워져 있다. 묘비 뒤쪽으로는 병풍을 연상하게 하는 소나무 숲이 타원형으로 에워싸고 있는데 소나무의 꼭대기 너머로 저녁해가 기울고 있다. 비총의 주변에는 추수가 끝나 벼의 밑동이 촘촘히 박힌 논바닥이 온통 휘덮고 있다. 어찌보면 비총은 작은 선산에 불과하여 애당초부터 서울의 서오능이나 태능에 견주어 비총의 규모를 상상했던 나로서는 여간 실망한 것이 아니다.
  오메, 이 새싹 잠 보소. 미스 홍은 비총의 진입로로 내려 서다가 소리친다. 노란 꽃잎까지 핀 새싹을 뽑아낸 그녀는 그것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는다. 자꾸 미스 홍의 코를 보게 된다. 미스 홍의 알몸이 마음 속에서 떠오르고 아랫배가 묵직해진다. 한 번 맡아보시요, 꽃 향내가 나제라우? 미스 홍이 꽃이 핀 풀을 내민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코를 갖다댄다. 꽃 향기라기보다 생선 비린내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러다가 미스 홍의 코가 시선에 들어온다. 화장실에 그려진 음화를 보면서 수음을 한 적이 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지하철 2호선 역의 한 화장실 벽면에 그려진 음화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볼일을 마치고 일어선 높이에 그려진 여자의 나체는 거의 실물 크기에 가까웠고, 볼펜으로 그린 솜씨가 전문가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목을 뒤로 젖힌 채 양손을 허리에 얹고 한쪽 다리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탄력있는 가슴과 조그맣게 그려 넣은 젖꼭지, 그리고 음모의 모양을 곱슬머리처럼 거칠게 그린 모습까지 놀랄 만하게 사실적이었다. 특히 늘어진 한쪽 다리는 선이 많이 그어지지 않았는데도 성욕을 느낄 만큼 육감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여자의 음부에 남성의 성기를 방망이 모양으로 세 개나 투박하게 그려 넣어 균형을 깨뜨리고 말았다. 나는 음화라고 보기에는 다소 수준이 높은 그 그림을 보면서 수음을 했다. 그리고 수동 카메라와 자동 카메라로 번갈아 촬영했다. 현상한 필름도 상태가 좋아 대형 달력 크기로 인화지를 뽑아 판넬을 만들어 작업실 중앙에 걸어 놓았다. 그 판넬을 처음 본 아내는 양쪽의 가늘고 길게 굽어진 눈썹 사이에 짧게 주름을 모았다가 풀었고, 그러한 표정을 나는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었다.   
  그 때 등 뒤에서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는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획 돌아본다. 택시가 좁은 공간에서 유턴을 하려던 찰나에 동산 뒤쪽에서 돌아나오던 시외 버스가 다가와 아슬아슬하게 멈춰 서 있다. 버스 기사가 창문을 열고 머리를 쑥 내밀고는 욕지거리를 하고 있지만 택시는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달아나 버린다. 쫓아가서 잡겠다는 것인지 버스는 곧바로 시동을 걸고는 뒤따라 달린다.
  다소 내리막길인 진입로는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 발길이 닿을 때마다 질퍽거린다. 길 가장자리를 골라 발을 내딛어야 하기 때문에 김기자가 앞장서고 내가 그 뒤를 따른다. 몇 걸음을 옮기고서 나는 우뚝 선다. 선 채로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어 목에 건다. 그리고 렌즈 뚜껑을 떼어 내어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카메라를 오른쪽 눈에 바짝 들이댄다. 비총 전체를 배경으로 삼아 렌즈를 조절하다가 나는 두 손을 슬그머니 놓아 버린다. 때문에 카메라는 목에 걸린 끈에 매달려 둔하게 흔들린다. 해를 마주보고 있는 데다가 비총의 전체 배경이 너무 어두워서 사진이 잘 나올 리가 없다. 뒤미처 오던 미스 홍이 나를 앞질러 가더니 김기자의 팔짱을 끼고 호들갑을 떨어 댄다. 김기자는 못마땅한지 몇 번씩 미스 홍의 팔을 뿌리치다가 뒤돌아 서서 내게 입을 허 벌리고 어이없다는 미소를 보내 온다. 사진 촬영을 포기하고 걸음을 옮긴다.

  우리 나라는 고려 예종 때 이후로 바람을 핀 사대부가의 아낙을 자녀(姿女)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성모랄이 급격히 경직되는 조선 시대로 넘어 오면서 바람난 여자들에게 어떻게 형벌을 가했는지 아십니까, 정선배? 가문형(家門刑)으로 할비(割鼻)의식이라고 부르는데 코를 잘랐대요, 코를. 옛날에는 남편이 바람을 피울 때 그의 아내가 잠든 남편의 코를 물어뜯어 화풀이를 했다는 얘기는 들어 보셨죠? 그뿐입니까. 심청전에 나오는 뺑덕어미는 코 큰 총각들만 골라서 엿을 사주었다는데 왜 그랬겠어요? 그리고 남도 지방에는 골 때리는 전래 민속이 하나 있어요. 냉병을 앓는 부녀자들이 은으로 만든 음경을 차고 다니면서 강한 양기를 받으려고 애를 썼다는데 이 물건을 뭐라고 불렀냐 하면 바로 ‘코’라고 불렀다네요. 외국에도 코에 대한 이야기가 적지 않더라구요.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우리 속담이 있잖아요? 이 속담이 우리만 사용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니까. 영국 속담에 ‘He falls on his back and breaks his nose’가 있더라구요. 해석해 보면 그대로 맞아 떨어지잖습니까. 16세기에 출판된 로디기누스라는 책에는 말입니다. ‘옛사람들은 훌륭한 코는 훌륭한 성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알았다’고 적고 있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나폴리의 악명 높았던 요하나 일고라는 여왕은 그야 말로 여왕벌이었나봐요. 궁에는 늘 전국에서 차출돼 온 코 큰 사내들로 붐볐다는데, 가령 이 사내들에게 수청을 들게 하고서 물건이 시원치 않으면 다음날 가차없이 코에 형벌을 내렸다는 겁니다. 알고 보면 역사는 곧 코의 수난 시대였다니까요.
  그렇게 코에 대해 끝없이 집착하던 김기자도 막상 지방 주재 기자로 발령이 나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향이 서울인 그에게 지방으로 내려가 근무하라는 것은 신문사를 그만 두라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그는 치욕 때문에 분노하기보다 패배감에 휩싸여 절망하는 눈치였다. 언젠가 김기자는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 사회부 김성교 부장의 코를 물어 버리는 무모함을 보였었고, 이를 괘씸하게 여긴 김부장과의 갈등은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유치할 정도였다. 어쨌거나 김기자는 자신의 인사이동에 김부장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믿고 있었다. 김부장이 편집국장과 막역한 사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김기자의 추측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부장과 김기자의 반목은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무려 삼 년이나 끌었고, 감정적이었다는 점에서 골이 너무 깊었다. 누구를 편들기에 앞서 이들의 싸움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고 성가시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직장 상사는 부하 직원의 승진에 깊이 기여할 수는 없다 해도 부하 직원의 승진을 결정적으로 저지하기 쉽다는 면에서 승패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노조 측에 보고하여 부당 인사에 대해 항의하겠다는 나의 말에 김기자는 손을 내저으며 말렸었다.
  내 코가 석 잔데 어쩌겠습니까? 코를 땅에 박으라면 두 말 없이 박아야지요. 코 아래 진상을 해본 것도 아니고 아닌 말로 코흘리개 버릇 고치겠다는데 제발 다 된 밥에 코 빠뜨리지 마세요.

  잘라 가기가 불편했을 텐데 왜놈들은 왜 코를 잘라 갔을까, 자르기 편한 목이나 머리카락도 있을 거 아냐? 계단을 오르면서 말을 꺼내자 김기자는 그럴 줄 았았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어느덧 주변에는 어둠이 낮게 깔리고 있다. 머리를 잘라 일본까지 가져가자니 운반하기에 곤란했을 테죠. 후배는 담배를 꺼내어 권하며 말을 잇는다. 나는 고개와 손목을 동시에 흔든다. 입으로만 숨을 쉬었고 계단을 오르는 동안 가슴이 벅차 올랐기 때문이었다. 원래 전리품이라는 게 전쟁의 업적을 기리고 아군의 사기를 올리자는 의도가 있었을 테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겠죠.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란 이름도 전쟁에 나가서 목을 많이 잘라 왔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하더군요. 모르긴 해도 장군일 경우에는 목을 잘라 갔을 거고 평민이나 계급이 낮은 병사들을 중심으로는 코를 베어 갔을 거예요.
  1층 계단을 다 오르자 길 양편으로 하나씩 표범을 닯은 동물상이 버티고 서 있다. 동물상을 지나 철제로 된 안내판이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하얀 색 페인트를 입힌 공간에 검정색 글자가 가득 메운 안내판에는 한글과 영어로 된 문장이 반씩 차지하고 있다. ‘정유재란 호벌치 전적지’라고 적힌 큼지막한 제목 아래에는 몇 급수 작은 한자 체로 ‘丁酉再亂 胡伐峙 戰績地’가 씌어 있고, 영문 제목으로 ‘MEMORIAL AT HOBOLCHI BATTLEGROUND’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김기자가 안내판을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나도 무심코 지나간다. 2층 계단을 다 올라서 키 작은 석등을 지나 맞닥뜨린 것은 김기자의 키 두 배 높이의 대형 전적비다. 낮게 엎드린 화강암 거북이의 등 위에 직사각형 검정색 비석을 곧추 세웠고, 비석의 머리에는 지붕 모양의 돌이 아닌, 네모지게 만들기는 했으나 모서리가 뭉툭한 돌이 얹혀 있다. 전적비 바로 옆에는 네모 반듯한 직사각형 돌 상자가 누워 있다. 오른쪽 구석에는 널찍한 화강암 위에 검은색 대리석을 얻은 비석이 보인다. 비석에는 ‘丁酉再亂 胡伐峙殉節碑’라고 두 어절로 나누어 가로로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그 순절비 옆에는 동자승을 닮은 키 작은 동상이 세워져 있을 뿐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비총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나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김기자가 말없이 턱짓으로 돌 상자를 가리킨다. 사과 궤짝만한 크기의 돌 상자에 2층으로 된 지붕을 얻었고, 정면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무궁화 모양의 조각이 붙어 있다. 그리고 보니 돌 상자 앞에는 종이로 만든 소주 한 개가 달랑 놓여 있다. 비총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초라한 돌 상자.

  신문사 노조가 파업에 들어간 것은 겉보기에는 무리한 사세 확장과 그에 따른 경영권 남용을 저지하자는 의도였지만 창업주의 사위인 상무, 그리고 편집국장 라인으로 이어지는 세력들의 쿠데타였다. 결국 노조의 파업에 못이긴 사장과 일부의 논설 위원들이 물러났다. 나는 김성교 부장이 출판 국장으로 내정된 일이 껄끄럽기는 했으나 어떻든 상관 없었다. 급작스럽기는 했으나 나는 결혼 날짜를 받아 둔 상황이었고, 김기자의 표현을 빌자면 내 코도 석 자나 늘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결혼 이후에 찾아온 축농증은 모든 것을 어긋나게 만들었다. 데드라인을 넘겨 원고를 넘기기 일쑤였고,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발기 부전 때문에 아내는 나의 성기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팀장에게 불려 가 귀뺨을 맞았어도 원고를 제 시간에 넘기지 못했으며, 병원을 찾았어도 병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던 나는 폭음이 잦았고, 자주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우연히 화장실에 낙서를 한 적이 있었다. ‘割鼻式을 擧行하라.’ 용변을 볼 때마다 내가 낙서한 문구를 발견할 수 있었고, 뜻하지 않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언능 가잔 말이요, 코가 떨어지게 춥구만은. 오줌을 누러 간다고 사라지더니 미스 홍의 짜증 어린 목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거슬러 올라온다. 어느 새 주위는 어둠이 짙게 배어 서로의 얼굴 윤곽만 알아 볼 뿐 표정을 분간하기는 어려울 정도다. 부안군쪽으로 이어진 국도는 어슴푸레하게 보이고 더러 인가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눈에 뜨인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무엇인가가 둔탁하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어어, 지금 뭐하는 거야! 김기자가 어이없게도 비총의 뚜껑을 들어내버려 돌 상자의 몸체만 남아 있다. 글쎄, 깨뜨릴려고 한 건 아닌데 깨져 버리네. 그러고 보니 김기자가 들어낸 돌 상자의 뚜껑은 두 동강이 나 한 쪽에 널브러져 있다. 김기자가 테니스 라켓 가방에서 부삽을 꺼내어 비총의 바닥을 파해치기 시작한다. 뭐가 있나 살펴봐야 직성이 풀릴 거 아닙니까. 오메메, 지금 뭔 짓꺼리를 하고 있다요?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데 미스 홍이 소리를 지른다. 아자씨들 도, 도굴범이라요? 미스 홍이 갑자기 뒷걸음질을 하더니 이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해프닝이야. 천천히 계단을 내딛으며, 내가 말문을 열자 김기자는 묵묵히 걸을 뿐 대꾸가 없다. 할비식도, 코를 상징적으로 그림에 그려 넣은 화가들도, 코만 보고 성기능을 유추하는 옹녀와 변강쇠도, 코를 자르면 우리 민족의 기를 꺾을 수 있다고 믿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다 집착이고 편견의 결과가 아니냔 말야. 역사적 해프닝이고. 비총을 파헤쳤지만 나온 게 아무 것도 없잖아. 비총에는 코가 없다구, 편견만 있을 뿐이야. 편견처럼 위험한 것도 드문 것 같아.
  김기자가 파헤친 비총 속에서는 한쪽 팔로 감싸 안을만한 크기의 항아리가 나왔다. 그 항아리 속에는 차고 거칠은 흙이 만져졌었다.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김기자는 태연하다. 비총 주위에는 어둠이 온통 휘덮여 앞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미스 홍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 아무리 둘러 봐도 보이지 않는다.
  날씨가 추워져 어느 새 바닥은 딱딱해져 있다. 축농증은 언제 다 났어? 비총 때문인가? 참아 왔던 말을 하자 계단을 다 내려온 김기자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그러더니 김기자는 엉뚱한 말을 꺼낸다. 정선배, 저기 전적비를 잘 보세요. 전적비 위에 얹혀진 것을 개석(蓋石)이라고도 하고 가첨석(加詹石), 또 개두(蓋頭)라고도 하는데요. 거기를 잘 보세요. 꼭 그거 대가리 같지 않습니까? 어둠 속에서도 윤곽이 뚜렷한 비석은 정말로 귀두(龜頭)처럼 보이고 전체적으로 거대한 성기가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는 듯하다.
  쌀쌀한 날씨에 손이 시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부안군쪽으로 난 국도 위에 올라 선다. 김기자도 말없이 뒤따라 걷는다. 미스 홍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제서야 나는 성기가 딱딱하게 곧추선 것을 알아챈다. 미스 홍의 오목한 코가 머릿속에 떠오르고 는실난실 성욕이 들끓기 시작했다.● 
                                       
                                        [『세계일보』, 1996년 1월 1일 ]



신승철

신승철입니다. 국문과 석사 과정에 있습니다. 저의 데뷔작을 올립니다. 허락없이 소설을 올려 송구합니다. 거사님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송구하다니, 무슨 소리. 웰컴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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