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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3-09 04:27:38 / Hit:3736  

방문






그날, 나는 한껏 심드렁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리모컨 버튼을 누르며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계속 하품만 나올 뿐이었다. 새로운 게 없었다. 몇 번이나 보았던 프로그램들 앞에서 또 다시 장단을 맞추고 웃는 것은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도 민망한 일이었다. 좀 전까지 냄새 나는 양말을 물어뜯으며 함께 놀자고 떼쓰던 검둥개도 어느새 발밑에서 배를 드러낸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마자, 반사적으로 리모컨 버튼을 재빠르게 눌러 텔레비전 소리를 줄였다. 이 시간에 초인종을 누른다면 경험상 십중팔구로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아 나선 교회 아줌마들이었다.
그녀들에게 처음에는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즉, 양이 아니라 고양이 과에 속한다는 고백이었다. 그런데 그녀들 사전에는 무신론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무교, 단지 종교가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고는 잘 만났다 싶었는지 더욱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래서 다음 방문 때에는 다른 종교를 슬쩍 빌려 ‘불교 신자’라고 말했다. 언젠가 절에 놀러 간 적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해도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자 그녀들은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목청을 높여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옛날에 절에 안 다녔던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지금은 다들 교회에 다녀요. 아휴, 시대를 모르시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협박성 발언을 동반한 그녀들의 개종 권유를 한 시간만에 뿌리치고 나서야, 아예 그녀들을 상대하지 않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시간에 초인종 소리가 들리면 사람이 없는 척 했다. 검둥개도 이러한 은폐 전략에 동의하는지 초인종 소리에는 짖지 않았다. 아마 검둥개도 목이 쉬어가며 한 시간 내내 그녀들을 향해 짖는 게 귀찮았을 것이다.
초인종 소리에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는 검둥개를 들어 가슴에 대고 안았다.
딩동.
그들은 보통 세 번까지 초인종을 눌렀다. 나와 검둥개는 숨죽이고 있었다.
딩동.
곧 되돌아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 소리가 들리면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문 밖에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계신 것 알고 있습니다. 문을 여십시오.”
그녀들이 아니었다. 어리둥절하다가 밖까지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세요?”
“우리는 개를 사러 왔습니다.”
“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개를 판다고 한 적은 없었다. 의아해하면서 검둥개를 안은 채 문 쪽으로 다가갔다. 집을 잘못 찾아온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개를 판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만? 혹시…….”
그때 중년으로 짐작되는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알고 있다오. 하지만 우리는 개를 사러 왔다네. 문을 열어보게. 이건 무엇보다도 자네에게 좋은 일이니까.”
계속 뜬금없는 소리였다. 도어뷰에 눈을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흰 양복을 입은 중년 사내를 가운데 두고서 검정 양복을 입은 젊은 사내 둘이 호위하듯이 서 있었다. 젊은 사내 하나는 007 가방을 들고 있었다. 젊은 사내들은 짧은 헤어스타일에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중년 사내는 풍채가 좋았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이들은 개장수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검둥개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검둥개를 어루만지며 진정시켰다. 그들이 외모가 유별난 개장수라고 해도 검둥개를 팔 생각은 없었다.
“아무래도 집을 잘못 찾으셨습니다. 저는 개를 판다고 어디에 연락한 적도 없고, 개를 팔 생각도…….”
“그 개는 잉글리시 코커 스페니얼 종. 나이는 두 살. 수컷. 이름은 아예 짓지도 않았더군. 무심한 주인이네.”
그건 분명히 가슴에 안고 있는 검둥개의 이력이긴 했다.
“맞습니다만…….”
“그렇다네. 우리가 바로 그 개를 사러 왔다네.”
검둥개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도, 사러 왔다는 것도 다 이상한 일이었다. 할 말을 잃고 머리를 갸웃거릴 때,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아무래도 순순히 열지는 않겠습니다. 부를까요?”
“아니야, 기다려보게. 곧 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
그들의 대화는 문을 열도록 압박하려는 것 같았다. 그들이 개를 사겠다는 말로 집에 들어와서는 강도로 돌변하는 식의 신종 강도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뜻 들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돈도 없고 안에 있는 물건들이라고 해봐야 역시 이 원룸만큼이나 낡고 값싼 것들인데 세 사내가 몰려다니며 그 따위 것들을 노리고 강도질을 한다는 것도 뭔가 이상했다. 어쨌든 그들이 강도단이 아니더라도 무지 수상한 무리였다. 경찰에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방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핸드폰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몇 발짝 움직이기도 전에 경찰에게 도움을 청할 근거가 아직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단지 문 앞에서 개를 사러 왔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내가 경찰이라고 하더라도, 장난 전화 하지 말라며 끊어버릴 게 분명했다.
핸드폰 찾기를 포기하고, 급히 창가로 다가가서 창문을 열어보았다. 길가에는 두 대의 검은 대형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 앞의 젊은 사내들과 마찬가지로 검정 양복을 입은 사내 셋이 원룸 입구 쪽을 향해 서 있었다. 아까 젊은 사내가 부른다는 게 저들인 것 같았다. 차 안에는 문을 강제로 여는 장비가 있을 수도 있었다.
다시 문 쪽으로 다가가며 이 상황에서 해야 할 행동을 생각해보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개를 사겠다며 문을 열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핑계 같았다. 그보다는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문을 여는 것이었다. 문이 열리면, 가져갈 것은 그다지 없어도 강도질을 할지도 모르고, 대가를 지불할 사람은 없겠지만 나를 납치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게 가장 유력한데, 아무 이유 없이 구타를 당하거나 아니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오프라인 모임 중인 사이코패스 동호회 회원들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에게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나의 죽음에 대해서 진정으로 관여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경찰은 관내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미제 사건의 하나로 행정적인 처리나 하면서 불쌍하다는 듯이 혀나 한두 번 찰 것이다. 타살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으면 자살로 처리할 수도 있었다. 경찰의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자살할 이유쯤이야 수두룩하게 많을 테니까.
다시 초조하게 도어뷰에 눈을 갖다 대었다. 이런 내 심정과 달리 그들이 회장님이라고 부른 풍채 좋은 중년 사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중년 사내가 마치 도어뷰의 조그만한 구멍으로 내 마음을 엿본 것처럼 말했다.
“설마 자네 우리를 두려워하는 건가? 아니면 의심하는 건가? 정말 우리는 개를 사러 왔다니까. 그것도 아주 후한 값에!”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고 애를 쓰면서 물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완연하게 떨렸다.
“왜요?”
갑자기 세 사내가 동시에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그들이 왜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웃음소리들은 나를 비웃는 것이라기보다는 정말 웃겨서, 마치 소파에 앉아 개그 콘서트라도 보면서 내는 소리 같았다. 배를 잡고 웃던 중년 사내가 겨우 웃음을 진정시키면서 말했다.
“자네, 재밌군. 왜요는 일본 담요를 뜻하는 말인가?”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하던 젊은 사내 하나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좀 썰렁합니다. 회장님.”
“그런가? 허허.”
그런데 젊은 사내의 말에 중년 사내는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제야 젊은 사내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깨달았는지 얼른 부동자세를 취했다. 중년 사내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한껏 너그러운 목소리로 문 쪽을 향해 말했다.
“자네, 인생을 바꾸고 싶지 않나?”
“예?”
“자네 인생을 바꿀만한 돈으로 개를 사러 왔네.”
“그러니까, 왜요?”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자신들의 의도대로 문을 열지 않자, 강경한 태도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약간 딱딱해졌다.
“자네가 문을 열지 않겠다면 그것은 자네 자유네. 암, 그렇고말고. 몸에도 좋고 마음에도 좋은 자유지. 하지만 언제까지 문을 열지 않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돌아갈 때까지? 그런 생각을 했다면 지금 포기하는 게 좋을 걸세. 왜냐하면 우리는 자네가 문을 열고 개를 팔 때까지 문 앞에 서 있을 거네. 우리는 불침번이라도 설 거야. 즉, 어차피 언젠가 자네는 문을 열어야 하는 입장이라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이 시간에 자네는 담배를 사러 가지 않나?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사더군. 맞지? 몸 생각 좀 하게. 자네 몸속의 앙증맞은 허파꽈리들이 불쌍하지도 않나?”
나는 중년 사내의 장황한 말을 들으면서 내 입장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년 사내 말대로, 사내들이 문 앞에 없었다면 지금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고 있을 수도 있었다. 떨어진 담배를 사러 가려고 하다가 귀찮아져서 좀 있다 가자고 생각하며 게으르게 리모컨 버튼이나 누르며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있던 참이었다. 중년 사내의 말을 들으니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러나 어쨌든 중년 사내의 말은 나를 납득시키려는 게 아니었다. 내가 문을 열 수 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뿐이었다.
“도무지 우리를 믿지 않는군. 보여주게.”
도어뷰 렌즈 속에서 중년 사내가 뒤로 크게 한 발짝 물러섰다. 중년 사내가 서 있던 자리로 007 가방을 든 젊은 사내가 이동했다. 그는 가방을 가슴까지 올렸다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가방을 눕히고 양손으로 받쳤다. 다른 젊은 사내가 다가와 가방 뚜껑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마치 숭고한 종교 의식 같았다. 그리고 가방 안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그 안에는 지폐가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심장이 진정시킬 수 없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넋을 잃고 있었다. 그때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천상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정말 자네 인생을 바꿀 수 있지 않겠나? 설마 부족한가?”
나는 중년 사내가 나를 볼 수 없다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직 액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저 가방 안의 지폐 한 다발만 준다고 해도 한동안 구름 속을 둥둥 떠다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가방 안의 지폐를 몽땅 다 준다고 말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큰돈을 저에게…….”
“그보다는 이제 문을 열지 않겠나?”
나는 문을 열었다. 그건 무의식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문이 열리자, 가슴에 안은 검둥개가 짖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내들은 정작 검둥개는 쳐다보지도 않고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중년 사내가 소파 한 가운데 털썩 앉았다. 중년 사내의 육중한 무게에 소파가 주저앉을까 걱정이 되었다. 가방을 든 젊은 사내는 뚜껑을 닫지 않은 채로 가방을 들고 들어와서는 잘 보라는 것처럼 방 한 가운데 놓았다. 그 자리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낡고 허름했던 방 전체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가방을 쳐다보다가 얼른 정신을 수습했다. 문을 완전히 닫지 않고 반쯤 열어 놓았다. 이 사내들이 여전히 강도떼 따위로 돌변할까봐 여전히 두려웠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손님이 된 것처럼 문가에 서서 가방과 중년 사내의 얼굴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검둥개는 여전히 시끄럽게 짖고 있었다. 얼른 물어보았다.
“정말 개 값으로 저 돈을…….”
“그렇다니까! 이제, 자네 돈이네!”
이제야 일이 순리대로 풀린다고 생각했는지 중년 사내는 호탕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왠지 소파 양쪽에 선 젊은 사내들은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리둥절한 내 모습이 웃긴 것일까? 여전히 믿어지지 않아서, 물어보았다.
“개 값이라고 하기에는…….”
“그래! 자네 인생을 바꿀만한 돈이지.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 거래를 하고 있는 거네.”
“거래요?”
“그렇지, 거래.”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은밀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작아졌다.
“자네 심정은 이해가 되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겠지. 하지만 자네가 눈치 챘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자네 같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비정부 조직의 요원들이네. 엔지오라고 들어본 적이 있겠지? 그것과 비슷한 거야. 다만 비밀스럽게 행동하기에 정확한 소속을 밝힐 수 없는 점은 양해하게.”
정부 조직에서 이런 일을 할 리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엔지오라면 그린피스, 국경 없는 의사회 같이 인류 차원에서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의 조직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왜 나를 찾아왔을까 싶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요?”
“자네와 같은 사람들이 충분한 돈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도와주는 게 우리의 임무라네. 좋은 일이지만 비공식적으로 대상자를 선정하여 하고 있지.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더구나 좋은 일이라도 공식적으로 하면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꼭 있네. 이와 같은 지원이 할 일 없이 노는 인간들을 양산할 뿐이고, 경쟁에 기초해야 할 사회 원리를 훼손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요즘은 정부가 발 벗고 나서서 하기가 어렵다 이거야. 해봐야 쥐꼬리 만큼이지. 그래서 우리는 이 일에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네.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니까.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사실 비공식적으로 충분한 돈을 주는 방법도 좀 문제가 있었네. 그동안 돈을 무상으로 지원했더니 효과가 생각보다 낮았어. 쉽게 얻은 돈이라 다들 그저 흥청망청 쓰기만 하더군. 그래서 우리는 대상자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후한 값을 주고 사들이는 방식으로 바꾸기로 했네. 그리고 자네가 첫 케이스로 그 혜택을 받게 되는 거지. 그동안 우리가 자네를 조사하고 관찰한 바로는 그 개가 그럴 가치가 있더군. 설마 지금 그 개를 팔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순간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체가 아니었다. 그들이 엔지오이든, 엔지오 할아버지든 상관 없었다. 문제는 그들 말대로 방 한 가운데 있는 돈이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만약 정말 그들이 나에게 돈을 준다면 미처 검둥개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것이 아쉬울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대충 지을까? 검둥이? 검탱이?
그러다가 여전히 가방 속의 지폐들이 내 것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몰래 방에 카메라를 숨겨놓고 찍고 있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이성을 잃고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싱크대에 있는 식칼이 눈에 띄었다. 얼른 눈길을 돌렸다. 그게 아니길 빌면서 말했다.
“그럴 리가요…… 그래도…… 혹시…….”
“허허, 정말 생각과 의심이 무척 많은 친구로군. 인생은 생각보다 간단해. 정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편하게 산타클로스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그 말을 들으니 풍채 좋은 중년 사내의 외모가 정말 산타클로스와 비슷해보였다. 그럼 검둥개는 앞으로 루돌프가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중년 사내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다행히 소파는 그동안 무사했다.
“그럼 이제 거래가 성립된 것으로 봐도 좋겠지? 자, 이제 개를 저 친구에게 내 주게. 우리는 바쁜 사람들이니까.”
젊은 사내 하나가 나에게 다가와서 개를 받으려고 양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사내의 손이 가까이오자 검둥개가 와락 달려들듯이 몸을 내밀어 사내의 손가락 하나를 물었다.
“악!”
젊은 사내가 손을 급히 뒤로 빼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깜짝 놀란 나는 가슴에 품고 있던 검둥개를 놓쳐 버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검둥개는 잠시 내 발 밑에서 젊은 사내들을 향해 몸을 낮추고 싸우려는 자세를 취했다. 으르렁거렸다.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슬금슬금 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내가 가만히 있자, 검둥개도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젊은 사내들이 달려들자 검둥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몸을 돌려 반쯤 열린 문을 통해서 밖으로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개가 사라지자, 젊은 사내들이 멋쩍은 표정으로 중년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중년 사내는 별다른 지시는 하지는 않고, 중얼거렸다.
“당돌한 놈이군.”
그리고 인사도 없이 이제 할 일은 다 마쳤다는 듯, 중년 사내가  문 밖으로 나갔다. 젊은 사내들도 따라 나갔다. 나는 그들이 나가자마자 급히 문을 닫았다. 방 한 가운데는 다행히 그들이 놓고 간 돈이 든 가방이 있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간 검둥개를 찾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검둥개가 그들 손에 들어갔다 해도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검둥개의 생도 그들의 방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들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떠돌이 개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나보다 더 좋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 제2의 생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꽤 귀여운 놈이었으니까. 검둥이, 검탱이보다는 좋은 이름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떠돌이개로 살다가 유기견으로 오해받아 보호소로 끌려가서 끝내는 주사 한 방에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다. 혹은 돌아다니던 개장수의 눈에 띄어 애완견에서 식용견으로 용도변경이 되어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한때 검둥개의 주인이었던 나는 가슴이 아프고,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이 경우만 아니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그리고 중년 사내의 말대로 나의 인생도 바뀌었다.
그날 나는 007 가방을 가지고 가장 가까운 은행에 갔다. 집에 두기에는 너무나 많은 돈이었다. 그런 돈을 집에 두면 그들이 나를 방문한 것처럼 당장이라도 진짜 강도떼가 방문할 것 같았다. 즉시 안전한 곳에 두어야 했다. 더구나 여기 원룸촌은 좀도둑이 활보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전에는 그게 없는 사람들끼리 가까운 곳에서 급전을 유통하며 쓰는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게 긍정적으로 이해했다고 해도 내 책상 위에 고이 모셔둔 넷북이 사라졌을 때는 매우 열받았다. 그러나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의 존재가 너무나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넷북은 다시 살 수 있지만 가방 속의 돈은 한 번 잃어버리면 큰일이었다. 인생을 바꿀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건 복구 불능의 심각한 문제였다. 나는 하루 빨리 곳곳마다 CCTV가 설치되어 있는 안전한 동네로 이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은행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보폭도 당당하게 창구를 향해 걸어갔다.
벨 소리와 함께 창구 전광판이 130번 손님을 불렀다. 내가 든 007 가방이 창구 쪽을 향해 굼뜨게 걸어가던 한 아줌마와 부딪쳤다.
“어이구!”
아줌마가 중심을 잃은 사이, 내가 먼저 창구 앞 의자에 앉았다.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오로지 빨리 일을 처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서 안전한 곳에 돈을 두어야 했다.
산뜻한 유니폼을 입은 창구 여직원이 그 광경을 보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손님, 130번 손님이신가요?”
번호표 따위는 뽑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이 은행에 아주 많은 돈을 입금하러 왔습니다.”   
창구 여직원은 내 형색을 살피고는 피식 웃었다. 싸구려 잠바를 입은 주제에 새치기나 하고서 허풍이나 치는 부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경멸하는 눈빛과 달리 목소리는 아직 정중했다.
“손님, 우선 번호표를 뽑으세요. 뒤에 번호표를 가진 손님이 기다리십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창구 여직원을 골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창구 여직원의 생김새로 보건데 술자리에서는 이런 목소리를 낼 거라 생각하면서 내가 들어도 얄미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했다.
“어머, 어쩌죠? 나는 번호표 뽑기를 아주 싫어하는데.”
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창구 여직원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손님!”
그러자 청원 경찰이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뒤의 아줌마도 중얼거리면서 계속 내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른 창구 여직원들도 나를 쳐다보며 슬쩍 인상을 썼다.
그러나 나는 느긋하게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007 가방을 만지작거리면서 창구 여직원 뒤 쪽에 있는 책상 의자에 앉아 졸음을 참고 있는 간부 직원이 듣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겨우 번호표 때문에 내가 돌아간다면 후회할 텐데?” 
창구 여직원은 나의 호장성세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남자치고는 피부가 하얀 간부 직원도 그제야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주변의 손님들도 슬금슬금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청원 경찰이 끼어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손님.”
나는 대답대신 창구 테이블에 007 가방을 소리가 나게 올려놓았다. 그 소리에 간부 직원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직원도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청원 경찰이 내 등 뒤로 슬슬 몸을 옮겼다. 등을 노리다니, 비겁한 놈. 하여간 다들 내가 007 가방에서 무기라도 꺼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그러한 행동과 표정을 최대한 즐기면서, 천천히 007 가방을 열어 보였다. 돈 대신 정말 MP-5와 같은 기관단총이 들어가 있었다면 더 재미있었을 것이다. 내 말과 동작 하나하나에 모든 이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 무대의 주인공인 것처럼 느껴졌다.
“헉!”
창구 여직원이 순간 얼어붙은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는 여직원도 마찬가지였다. 간부 직원은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고 있었다. 아마 뒤쪽에 있는 청원 경찰도, 아줌마도, 다른 손님들도 저만큼 입을 벌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007 가방을 닫았다. 나는 짐짓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급한 사람인데 굳이 번호표를 뽑으라고 하니 다른 은행으로 가지요.” 
간부 직원이 넘어질 듯 휘청거리면서 내가 있는 창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여직원 어깨를 툭 치며 나무랐다.
“아직도 사람 볼 줄을 모르는 거야?”
간부 직원의 질책에 여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간부 직원은 역시 넘어질 듯 휘청거리면서 창구 바깥쪽으로 나왔다. 그리고 일어나려는 시늉을 하는 내 팔을 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선생님, 저 직원이 신참이라서 아직 미숙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VIP실은 저쪽입니다. 어서 저와 함께 가시지요.”
나는 못이기는 척하고 일어나며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혼내시지 마세요.”
그 말에 여직원이 감사의 표시로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간부 직원을 따라갔다.
VIP실의 소파는 원룸에 있는 내 천 소파와 다르게 매우 안락했다. 고급 가죽 소파였다. 내 소파도 이제 바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앉자마자, 간부 직원이 어떤 차를 좋아하시냐고 물었다. 나는 농을 걸었다.
“저는 도요타 수프라를 좋아합니다.”
간부 직원은 나의 말에 되지도 않을 맞장구를 쳤다.
“오, 그렇군요! 저는 아직 소나 타는 차를 탑니다. 그런데…… 손님, 그게 아니라, 마시는 차는 커피를 드릴까요? 녹차를 드릴까요?”
“알아서 주십시오.”
“예, 예. 그런데…… 첫 거래이신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007 가방과 주민등록증, 도장을 간부 직원에게 주며 말했다.
“거래를 트고 싶군요. 앞으로 종종…….”
간부 직원이 허리를 굽힌 채로 허겁지겁 007가방과 주민등록증, 도장을 챙기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선생님. 저희 은행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계속 이용해주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곧 계좌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황급히 VIP실을 나갔다.
잠시 후에 창구에서 내가 놀렸던 여 직원이 차를 가지고 왔다. 여직원은 차를 내려놓고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손님.”
나는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여 직원의 날씬하고 흰 종아리를 칭찬했다.
“백만불 짜리 종아리군요. 아주 삼삼해요.”
여 직원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는 원두 커피였다. 내가 커피 잔을 들 때 여 직원이 다소곳이 나가고, 간부 직원이 황급히 들어왔다. 몸 동작이 빠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어설픈 구석이 있는 게 이 간부 직원의 특징인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맞은 편 소파에 앉더니, 내가 커피를 마시는 것을 약간 느끼한 미소를 지은 채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딘가 어색했다. 내가 잔을 내려놓자마자 간부 직원이 말했다.
“선생님,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음?”
“액수가 많아서 확인하는데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돈을 셀 때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폐들은 백 장씩 종이로 묶어놓았지만 확실하게 액수를 알려고 일일이 세어 보았다. 그런데 왠지 간부 사내의 눈빛이 계속 초조해보였다. 내가 비록 옷차림은 간소하지만 알고 보면 엄청난 VIP 고객인데, 여직원과의 실랑이 때문에 은행에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을까 싶어 걱정하는 듯 보였다. 은행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예금 유치 실적이 중요할 테니까. 그래서 긴장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었다. 친절을 베풀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기계로 세도 오래 걸리는군요.”
“한 번만 세지 않습니다. 보통은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셉니다. 더구나 이런 큰 돈은 한 번 더 세죠. 총 세 번 셉니다.”
“철저하군요.”
“예, 그런데 현금이 많으신가봅니다. 부럽습니다.”
간부 직원이 정말로 부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기에 나는 의기양양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대범하게 말했다.
“뭐, 껌 값이지요.”
껌 값이라는 말에 간부 직원이 목이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고개를 심하게 끄덕였다. 그때부터 나는 간부 직원이 묻지도 않은 나의 가족사와 재산 내역을 새로 쓰기 시작했다. 사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게 많아서 그렇다.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벅찼다.) 그렇지만 오늘 가져온 돈은 내가 자그마한 회사를 운영하면서 얻은 이익금의 일부이다. (원룸이 사무실이다.) 그래서 내 소중한 시간과 노동이 담긴 돈이다. (그동안 검둥개에게 밥을 먹이고 함께 놀아주고 매번 응가도 치워주었다.) 나에게 맞는 은행을 찾기가 참 힘들다. (통장 잔고가 거의 바닥난 지 꽤 오래다.) 나에게 펀드 권유는 제발 하지 마라. (반토막이 웬 말이냐? 은행은 자폭하라! 아니, 지금 자폭하면 곤란하니, 각성하라! 각성하라!) 나는 있는 재산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다. (다 필요 없다. 이 돈으로 줄창 놀고 마시련다.) 간부 직원은 말없이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했다.
이렇게 중얼거리듯이 말하면서도 나는 앞으로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먼저, 해외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순식간에 눈앞에 푸른  카리브 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에서 아리따운 아가씨 셋과 함께 보트를 타고 밀회를 즐길만한 섬으로 가련다. 그녀들은 백만불 아니 천만불 짜리 몸매의 소유자들이다. 그 섬에서 그녀들과 함께 즐겁게 놀고 마시다가 밤에는……  나는 몸도 마음도 모두 부풀어 올랐다. 탱탱해졌다.
그때 VIP실문이 활짝 열렸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점퍼를 입은 세 사내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동작은 매우 신속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그들은 지구로 돌진하는 소행성들 같았다.
“어…….”
무엇인가 잘못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에 이미 그들은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있었다.
“형법 제207조 통화에 관한 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인생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내가 수갑을 차고 경찰서에 들어가자마자 몇몇 형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마치 대어를 낚은 낚시꾼의 표정들이었다. 조사를 받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몇 년째 경찰은 비밀리에 전담반을 꾸려 위조지폐조직을 잡으려고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 놓친 모양이다. 그동안 그들이 유통시킨 위조지폐가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런데 그 말을 해주는 형사의 얼굴은 위조지폐로 인한 경제적 혼란이 걱정된다기보다는 그동안 그들을 잡지 못해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는 투였다. 어쨌든 뉴스를 보지 않는 내가 그런 일을 알 리가 없었다. 아니, 비밀리에 전담반을 꾸린 것을 보면 뉴스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애당초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조사실에서 나는 한때 사귀었던 여자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진심어린 말투와 표정으로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세 사내에게 개 값으로 007 가방의 위조지폐를 받게 된 경위를 진술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대머리 형사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피식 웃었다.
“지폐를 위조하는 기술만 뛰어나군. 그 이야기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아. 지금 나보고 그 이야기를 믿으라는 건가? 장난하나? 경찰이 우습나?”
나는 가슴을 치며 항변했다.
“제가 정말 위조지폐범이라면 잡힐 줄 알면서 은행에 가겠습니까? 제가 바보입니까!”
대머리 형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실은 나도 그게 이상하더군. 그렇지만 돈을 너무 쓰다 보니 현실 감각이 사라진 게 아닌가? 사람이란 그렇지. 그런 거야. 그래서 아무리 주도면밀한 범죄자도 결국은 실수를 하게 되는 법이지. 이제 그만 엉뚱한 이야기로 시간 끌지 말고 자네 일당이 누구인지 말해. 정상참작에 대해서는 들어보았겠지?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되진 않았겠지?”
나는 답답해서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때 다른 형사가 조사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이 녀석 집에서 위조지폐에 쓰인 종이가 여러 뭉치 나왔습니다.”
그 말에 대머리 형사가 히죽 웃었다.
“유력한 증거군. 그동안 자네는 종이를 공급했나?”
종이라니? 원룸에 종이라고는 달력과 화장지, 날짜 지난 스포츠 신문, 나조차도 방에 언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몇 권의 책들 밖에 없을 텐데. 그렇다면 007 가방을 준 사내들이 내가 은행으로 간 사이 그것을 갖다놓았단 말인가? 그제야 나는 함정에 빠진 내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나는 울부짓듯이 말했다.
“제가 준 것은 검둥개…… 그것도 그들이 가져갔는지도 확실하지 않아요!”
나는 그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계속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대머리 형사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묵묵히 생각하다가 이제 감이 잡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음. 그쪽에서는 거래 시에 위조지폐용 종이를 검둥개라고 부르는 모양이군.”

이후에 나는 언론에 위조지폐범으로 언론에 소개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를 통해서 거대 위조지폐조직의 전모를 알아낼 수 없었던 경찰은 거대 위조지폐조직이 있다는 사실은 숨긴 채 그동안 내가 독자적으로 위조지폐를 만들어왔다는 식으로 보도 자료를 만들어 돌렸다. 그 보도 자료에 따르면 나는 자신의 위조지폐기술에 심취한 나머지, 대담하게도 그리고 그만큼 멍청하게도 은행까지 찾아가 입금을 시도한 범죄자였다. 그동안 똑똑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바보라는 말은 듣지 않고 살아왔는데, 한순간에 덜 떨어진 놈이 되었다. 아마도, 이런 사건이라면 카리브 해에 있는 작은 나라 신문에 해외 토픽 기사로 소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와 함께 야자수가 무성한 섬에서 밀회를 즐겨야 했을 아리따운 세 여자들은 그 기사를 보고 푸하하하 웃었겠지. 
경찰에게 나를 장난치듯이 먹잇감으로 준 중년 사내의 말대로 나의 인생은 이렇게 바뀌고, 또 바뀌었다. 하지만 앞으로 오 년 동안은 법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 기간만큼 교도소에서 지내야 한다. 그런데, 법적이라…… 묘한 안정감을 주는 말이다. 인정만 하면 생각도 고민도 더는 할 필요가 없다. 그런 것이다. 그냥 5년이구나, 그렇게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들어와서 보니 원룸에 있으나 교도소에 있으나 결국 방 안에 있는 것은 똑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더 편하다. 더구나 여기는 다들 겸손하게 사는 곳이라, 돈도 그다지 필요없다.
그렇지만 일상의 세세한 모습은 꽤 바뀌었다. 예를 들면 전에는 원룸 소파에 앉아 심드렁한 얼굴로 리모컨 버튼을 눌러대며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면, 지금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각진 자세로 앉아 교도소에서 틀어주는 녹화 방송을 본다. 검둥개 대신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옆에 있다. 그래서 이른바 교우 관계라는 것도 생겼다. 나는 특히 3085번과 생산적인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3085번은 내 죄명을 듣고 직종 전환을 고려 중이다. 나는 은행에만 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3085번은 나중에 밖으로 나가면 동업을 하자고 조르는데, 8619번인 나는 사실 아무런 기술도 없거니와 정작 3085번이 가진 기술이 더 탐난다. 3085번은 공문서 위조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면 내 스펙을 무료로 확실하게 바뀌어주겠다고 늘 호언장담한다. 그건 좀 고민 중이다. 뭐, 아는 게 있어야 스펙이 있는 척도 하지. 그렇게 생각하면 지폐를 위조하는 게 한결 깔끔하다. 지폐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사람이 지폐를 가릴 뿐이다. 그래서 3085번이 직종 전환에 매력을 느끼나보다.
그렇게 3085번 옆에서 속삭이듯이 잡담을 나누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다. 모두 내가 한 번도 보지 않았던 프로그램들이다. 더구나 누구에게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이다. 금연도 하는 중이다. 시간을 정해서 운동도 시켜준다. 그야말로 몸 튼튼 마음 튼튼이다. 예배도 보러 다닌다. 알고 보니 나는 길 잃은 양은 아니지만 배고픈 어린 양이인가보다. 예배 후에 주는 초코파이가 정말 맛있다. 일상에 이렇게 많은 기쁨이 숨어 있었는데 이제껏 왜 몰랐을까 싶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있다. 이것을 생각하면 분명 인생이 바뀌었다고 느낀다. 즉, 나도 끊임없이 주목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쪼그리고 앉아 큰 일을 보다가 문 밖에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는 간수와 눈이 마주치면, 밀어내려고 애를 쓰던 내 안의 사악한 덩어리 대신 눈에서 짠물 비슷한 게 나오기도 한다.   






꽁트라고 하기에는 조금 길고,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미숙한 작품 하나 올려봅니다. ^^;

 

흐음, 재밌네. 근데 전반부에 비해서 후반부가 다소 소략하게 처리된 듯. 전반부 수준의 유머러스한 톤으로 좀 더 세밀하게 다듬어보는 건 어떨까. ^^;

 

예, 시간 들여서 세밀하게 다듬어보겠습니다. ^^;

 

후반부를 조금 더 세밀하게 다듬었습니다. ^^;

 

한결 더 재밌어졌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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